[칼럼: 박중순 목사의 목회트랜드] 목회자의 글쓰기(2) 글쓰기는 고통입니다

목회자의 글쓰기 2. 글쓰기는 고통입니다.

목회자의 글쓰기는 고통입니다. 고통은 서로 통하지 않으면 생기는 아픔입니다. 고통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통은 고통을 이겨내는 좋은 방법입니다. 목회자가 글을 써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글쓰기는 가장 좋은 소통입니다. 글쓰기는 목회자가 자신의 삶과 소통합니다. 글쓰기는 성도들과 소통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글쓰기는 세상과 소통하는 매우 중요한 행로입니다. 하지만 글쓰기 자체가 고통입니다. 목회자의 글쓰기가 고통인 이유는 매우 높은 소통의 통로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고통입니다.

글쓰기는 고통입니다. 글은 필자의 고통과 고난을 양분 삼아 자신의 열매를 맺어 갑니다. 목회자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분명 합니다. 목회는 고통과 고난, 인내와 오래 참음의 시간을 지나야 하는 긴 여정입니다. 이런 긴 여정의 시간 속에서 목회자는 자신들의 목회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모든 목회자가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목회자들이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고통을 통과한 글은 힘이 있습니다. 고난을 먹고 자란 글은 쉽게 잊혀지지 안습니다. 고통의 눈물과 고난의 피를 잉크 삼아 한자 한자 써 내려간 글은 천년을 견뎌내는 힘이 있습니다.

중국의 대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이며 문필가 입니다. 그는 기원전 145년 중국 한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문장이 뛰어나 왕가의 역사적인 사건을 저술하는 일에 발탁 됩니다. 그는 기원전 99년에 있었던 이릉 전투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변호를 기술 했습니다. 8만이나 되는 적군을 5천의 군사가 막아 내기는 무리였기에 그의 항복이 정당 하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왕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왕은 이미 적국에 항복한 이들을 반역자로 규정 했기에 사마천의 글이 왕의 의견을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 했습니다. 결국 한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언도 했습니다.

그 당시 사형을 선고받으면 3가지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금 5만냥을 내고 풀어 나거나, 사형을 받거나 궁형을 받는 것입니다. 그 당시 금 5만냥은 한 나라 군인들의 1년 연봉에 해당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사마천이 이 돈을 감당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궁형은 사회적으로 가장 치욕 스러운 형벌 이었기에 사형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궁형을 선택 합니다. 남성의 성기를 잘라내야 하는 악랄한 형벌 이었습니다. 사마천은 목숨을 건졌지만 형벌을 받은 신체에 감염이 되어 늘 피고름을 빨아 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름이면 살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멀리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극심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끓으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사마천은 자신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사기’를 기록합니다. 고통을 이기기 위해 글 쓰기에 몰두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그 내용 면에서도 휼륭 하지만 기록된 양으로도 어마 어마한 작품입니다. 사기는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열전이 70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궁형을 받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사마천임을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성경의 힘은 고통과 고난의 역사속에서 기록된 글이란 점입니다. 성경은 많은 고난의 역사속에서 살아남은 글입니다. 성경도 금서로 지정되어 분서갱유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어왔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로 성경을 탄압하거나 금기시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 박해 기간동안 성경을 금하고 예배가 금지 되었습니다. 성경을 소지하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성경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서적들이 불태워졌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된 이후 성경은 사제들에 의해 독점 되었습니다. 성경독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상의 언어로 성경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틴어 이외에 번역된 성경은 엄격히 금지 되었습니다. 성경번역은 화형에 처해지는 가장 무서운 배교로 여겼습니다. 수많은 번역본이 불태워졌고 파기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존 위클리프와 롤라드 운동입니다.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 추종자들은 롤라드라고 불리웠습니다. 위클리프의 성경과 롤라드 운동은 카톨릭에 의해 정죄 되었습니다. 번역된 성경을 소지 하는 것 만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성경의 탄압은 근대에 들어와서도 나치에 의해 공산치하에 의해 빈번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오랜 시간 고통과 아픔의 무게를 고스란히 견뎌온 책입니다. 그렇게 고통의 무게를 견뎌온 말씀이기에 성경은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고통을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고통의 시작과 고통의 끝을 보여 줍니다. 고통을 향해 달려 갑니다. 성경속에 등장하는 고통과 고난의 이야기는 십자가의 고통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고통을 통과한 생명은 힘이 있습니다. 고통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고통이 모든 고통을 이해 할 수 있는 이유 입니다.
고통을 통과한 글은 고통을 견디며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목회 현장은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는 많은 성도들의 삶의 현장입니다. 특별히 이민의 삶과 현장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의 현장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목회자의 글쓰기는 용기와 힘을 줄 수 있습니다.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을 줄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글쓰기는 고통의 현장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힘을 줍니다. 이민 목회 현장을 가장 잘 아는 목회자가 이민 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향해 글을 써야 합니다. 모든 목회자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입니다. 내가 목회하는 현장의 성도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글은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고통을 받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이민 목회 현장의 목회자 입니다. 그런 목회자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 있는 고통의 소재를 외면하고 글을 쓰지 않는 것은 목회자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님들도 글을 써야 합니다. 선교현장과 삶은 선교사님들이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목회자들은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현장의 삶을 글로 남기고 표현 해야 합니다. 그 글이 현재의 목회 현장과 앞으로의 목회 현장에 가장 큰 힘과 위로의 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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