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나그네 (3), 특수 미션을 가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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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3), 특수 미션을 가진 사람들

“크리스천은 이 길을 달려 갔다. 크리스천이 십자가에 이르렀을 때 그의 무거운 짐이 어깨에서 풀어져 떨어지더니 구르기 시작하여 무덤 속으로 빠져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짐을 벗은 크리스천은 기쁘고 쾌활해진 즐거움으로 한참 동안 십자가를 바라 보았다. 그의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 내렸다. 크리스천은 기뻐서 세번 뛴 후에 다시 계속 길을 떠나며 노래를 불렀다. ‘나의 죄를 지고 이렇게 멀리 왔네. 여기 이르기까지 나의 고통을 면할 길 전혀 몰랐네. 이 얼마나 놀라운 곳인가? 여기가 내 행복의 시작인가? 여기서 나를 묶었던 사슬이 끊어지는가? 복된 십자가여! 복된 무덤이여! 내 대신 수치를 받으신 그분이시여!’ 

   그후 크리스천은 누워 자는 이들(그들의 이름은 미련쟁이, 게으름뱅이, 거드름쟁이)을 깨우려 그들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이보시오! 당신들은 바다 한 가운데 있는 돛대 꼭대기에서 자는 사람들 같네요. 당신들 아래는 밑도 없는 깊은 죽음의 바다가 있소. 어서들 일어나서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납시다. 원하신다면 당신들 발목에 채워져 있는 이 쇠고랑을 내가 풀어 주겠소. 잠자던 그들은 크리스천을 올려다 보면서 제각기 한 마디씩 대꾸했다. 미련쟁이: ‘나는 아무 문제가 없소.’ 게으름뱅이: ‘그래도 나는 잠을 더 자야해요.’ 거드름쟁이: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당신 일이나 해요.’ 크리스천은 어쩔수 없이 자기 길을 계속 진행했다.

   위험의 길에 처한 그들을 생각하며 힘들어 하던 크리스천은 멀리 좁은 길 왼쪽 담을 뛰어 넘어 자신 쪽으로 걸어 오는 두 사람을 목격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형식주의자이고 다른 사람은 위선자였다. 크리스천: ‘선생님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요?’ 형식주의자와 위선자 (형위자): ‘우리는 헛된 영광의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지금 주의 이름을 찬송하기 위해 시온 산으로 가는 길이오.’ 크리스천: ‘왜 문이 아닌 담을 넘어 들어 옵니까?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는 말씀을 모릅니까?’ 형위자: ‘우리는 항상 해 온 대로 지름길을 찾아 담을 넘어 다니죠. 우리의 행동은 천 년 이상 지속 해 온 관습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 길에 들어섰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어떤 길로 들어 왔느냐가 무슨 문제가 되나요? 당신의 상황이 우리보다 나을 게 뭐란 말이오?’ 크리스천: ‘나는 주님의 법에 따라 길을 갑니다. 당신들은 자기 멋대로 무례히 행하고 있어요. 당신들은 이 길의 주인이신 주님께 이미 도둑으로 간주되었소. 당신들은 주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고 나가게 될 것이오.’ 이 말에 형위자는 대답하지 않고 서로 마주보며 조소의 웃음을 지었다. 크리스천은 높은 언덕을 오르며 독백한다. ‘이 길이 생명의 길인데, 고난이 나를 막을 수 없다. 가자, 용기 있게.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라. 쉽고 편한 길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니, 어려워도 바른 길로 가는 것이 유익이네.’”

   이 이야기는 이 땅에서 기독교인은 순례자, 즉 나그네임을 조명하는  존 번연의 『The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의 일부입니다. 번연에게 순례자는 평생의 여정이 한 곳, 즉 하늘을 향하여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자이며, 이 길에서 일탈한 자들에게 바른 방향 감각을 일깨우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위치를 설명하는 세번 째 단어인 “파로이코스”는 이 의미를 잘 설명합니다. 고전 희랍어에서 파로이코스는 “거주 외국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주 외국인은 자신들이 현재 생활하는 나라에 귀화하지 않고 잠시 머물기 위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곳에서 외국인 세금을 냈고, 정부의 허가 받은 체류자였습니다. 그는 어떤 곳에 머물렀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속한 곳의 시민권을 포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외국인으로 거주하는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사명입니다.   

   시편 105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그네 되어 이 나라 저 나라로, 이 민족에서 저 민족에게로 떠돌아 다닌 역사적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 이유는 국가 내적으로 “그들에게 주의 법을 따르게 하고, 주의 명령에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십시오.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십시오”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거주 지역에서 나그네로 여겼지만, 그들이 평범한 삶과 생활에서 벗어나 고립되고 무활동적으로 은둔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믿음과 본향을 찾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선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이 낱말은 특히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나그네는 강제로 혹은 선택되어서 팔레스타인 밖의 나라들인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그리고 앗수르에 땅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을 의미했습니다. 나그네 앞의 수식어 “흩어진”의 동사형 “디아스페이로”는 “생명이 있는 씨를 전 지역에 뿌리다”는 뜻입니다. 이때 흩어지게 하는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유대 민족을 흩어서 다른 지역에 거주하게 하고, 그곳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자 믿음의 사람들이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던 근본 요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었습니다. 흩어짐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사실은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이르러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에서도 확인됩니다. 워렌 위어스비는 베드로가 사용한 “흩어진 나그네”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흩어진 나그네에 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극심한 고통과 핍박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 중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비기독교인들에게 심한 욕설을 들었다. 베드로는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고난을 주는 사람들에게 좋은 증인이 되도록 용기를 주고, 또한 그들이 받는 고난은 반드시 영광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편지를 썼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땅에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하늘의 특수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생활하는 나그네들입니다. 본향이 아닌 이곳에서 부적절한 대우를 받는 현실을 피할 수 없지만 나그네의 길은 생명의 길이고 영광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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