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 (1), “죄값을 대신 갚다.”
제임스 데니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인간의 마음을 자연 그 자체로 놓아둔다면 무슨일이 발생할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답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지속되고, 죄인은 과거로부터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미래는 과거에 저당잡혀 있으며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나병으로 썩어진 그의 몸은 어린아이 살처럼 결코 회복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희망은 신약의 핵심 메시지인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 더 구체적으로는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용서가 죄인들에게 중재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 즉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은 아무 대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작동됩니다. 필립 다드릿지는 은혜를 이렇게 노랬습니다. “은혜! 청아한 그 소리 내 귀에 은은히 들리고 메아리쳐 울려 퍼져 온 땅에 그 소리 가득하네. 은혜는 배신한 인간에게 길을 열어 주는 제 일인자 은혜가 닦아 놓은 계단마다 놀라운 계획이 수놓아지네.” 전혀 자격 없는 자에게 과분한 총애와 자비가 부어지는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이뤄진 것입니다.
이곳에 사용된 구속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아포루트로시스”입니다. 이 낱말의 어근은 입고 있던 갑옷이나 투구 혹은 몸에 걸친 무거운 것을 풀어 느슨하다는 의미를 갖는 “루오”입니다. 루오는 갇혔던 상태에서 “해방시키다,” “묶고 있는것을 끊어내다,” 또는 동여 매고 있던 것을 풀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포루트로시스는 후에 줄에 매어 있거나 우리에 가둔 짐승을 풀어 놓을 때, 그리고 죄수를 착고에서 자유케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계속 발전하여 죄수나 노예 혹은 전쟁 포로를 몸값은 받고 풀어 주거나 해방 시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낱말은 헬라어 구약 성경에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처음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대속 (代贖redeem)할 것이요 처음 태어난 부정한 짐승도 대속할 것이며 그 사람을 대속할 때에는 난 지 한 달 이후에 네가 정한 대로 성소의 세겔을 따라 은 다섯 세겔로 대속하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사람과 짐승은 그 자체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값을 돈으로 환산하여 대신 드렸습니다. 돈으로 가격을 지불한다는 이 의미는 후에 먹을 양식이나 밭이나 또는 노예를 “사다 buy” 혹은 “구입하다 purchase”는 의미로 쓰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간을 위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죄의 삯인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물이 되신 이유는 그것만이 인간이 지닌 흉악한 죄가 용서받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어떤 기독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해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값을 지불하신 것은 그분의 깨끗한 삶이나 도덕적 완전함이나 성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나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속은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다시 부활하신 일들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를 구속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 구속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이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고 가볍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막연하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구속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깊이 스며들어 있는 불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비난과 파멸을 일으킬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 삼으셨습니다. 구속의 은혜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