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믿음(3), “은혜의 신성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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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3), “은혜의 신성한 행위”

우리는 믿지않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역으로 믿음의 증거는 행동으로 보여집니다.  믿음으로 번역되는 히랍어 “피스토스”는 복종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피스토스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행위의 타당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삶에서 반응하는 행동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수용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 새로운 자신을 드러내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곧 인간의 순종의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 원칙을 말씀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우리에 던져졌습니다. 당시 신 (god) 으로 여겨졌던 다리오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 우리에 넣는다는 법을 무시하고 날마다 하루에 세 번씩 자기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은 다니엘을 우리에 넣기 전에 “네가 늘 섬기던 너희 하나님이 너를 구해 주실 것이다”고 알려줍니다. 다음 날 새벽에 우리를 찾아 온 왕에게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로 소개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황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않으면 용광로 속에 던져질 것이라는 왕의 명령을 알면서도 거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참으로 내 신들을 섬기지 않고 내가 세운 황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느냐?”고  마지막 경고를 합니다. 그들은 “왕이시여, 이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왕께 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용광로 속에 던져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타는 용광로와 왕의 손에서 구해 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왕이 세운 황금 신상에도 절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아 주십시오”라고 왕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왕을 거절하는 그들의 행위는 저돌적인 무모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간섭하지 않으신다면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는 이들의 행동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굳게 서고 용감하게 행동할 것이다.”그들의 거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담대하게 말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종교 권력자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답합니다. 교회의 적대자였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이름 뿐만 아니라 삶이 통째로 바뀌었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 사명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것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가졌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와 명예가 직접적으로건 암묵적이든 위태롭게 되는 상황에 민감하게 하며, 문제가 그냥 진행되도록 놓아 두기보다는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 문제에 대하여 행동하도록 마음을 장려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라고 말한 바울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믿음은  악이 아닌 선을 행하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이 되는 것은 정적인 일이 아닌 믿음 안에서 사는 동적인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나의 피스토스 안에 서 있지만,믿음은 각자의 구체적인 삶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생활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항상 개인의 삶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언급할 때, 무슨 탁월한 은사를 가졌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도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증거인 사랑은 마음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고, 믿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낳는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조건 없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영혼의 전환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개인의 삶에 순종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신성한 행위를 일으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자신의 행위만으로는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란 사람이 믿음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입니다. 사람이 헌신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원리를 강조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이곳에서 거절되는 행위는 의를 이루려는 율법의 행위에 제한 되는 것이지, 믿음이 일으키는 순종의 행위가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근거로 삼으려는 태도는 거짓된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최고의 의미에서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에 반응하는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성취와 업적을 높이려는 모든 시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은혜 받은 사람들에 대한 강력한 기대를 갖고 계심을 분명 하게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영혼에 진한 감동을 경험하게 하여 신성한 행위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용서할 것을 기대하셨고(마 6:12), 무화과 나무에는 열매를 맺을 것을 기대하셨고 (눅 13:6-9), 제자 들에게는 섬김을 기대하셨고 (막 10:41-45), 부자에게는 나누어 줄 것을 기대 하셨고 (눅 19:1-10), 사랑받은 사람에게는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 13:34-35). 예수님의 기대는 추가적인 선물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을 때” (눅 19:9)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직면해야 하는 불쾌한 일이나 잃게 되는 권리에 전혀 요동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결과와 상관 없이 기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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