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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너는 너, 나는 나 (요한복음 21장  22절)_코막스벨리교회 박재신 목사

너는 너, 나는 나 (요한복음 21장  22절) 

코막스벨리교회 박재신 목사

이 지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맨 처음으로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승천하시기 전까지 수차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있는곳, 디베랴 호숫가(갈릴리 호숫가)로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에 요한복음 20장 21절을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으로부터 “가라”는 사명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그는 사명받은자라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디베랴 호수에서 그는 다른 동료들 –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가서 (주님의 뜻을 이루라는) 사명을 받았던 베드로. 하지만 그는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지며 밤새도록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을 지새우며 일한 결과는 꽝, 헛수고 였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치,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을 보았지만, 또한 그의 얼굴을 마주대하며 대화까지 했지만,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이가 부활의 주님인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이가 예수님인줄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했던 마리아가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비로소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음을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기잡이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도 주님은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요 21장 6절)

우리는 이 속에서 중요한 것을 하나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의 눈을 크게 뜨고 있다고 해서, 주님을 볼수 있는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며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고 해서 주님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은 얼마나 열심히 고기를 잡기 위해 배에서 일을 하였을까요? 우리는 어떤 일이든 – 그 일이 직장일이든, 교회일이든간에 일 그자체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선행을 통해서도 주님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말씀을 듣자, 제자들은 그대로 행합니다. 비록  이 말을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모습은 그저 순종이었습니다. 

사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고기 잡는 일에서는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을 제자들이었지만,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사람이 ‘이러 쿵 저러 쿵’ 지시할 때, 이를 무조건 따르기는 쉽지만은 결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부들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나의 상식을 초월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사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때로 우리는 착각에 빠져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제일 똑똑한 것 같고, 

내가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할 때, 모든 것들이 제일 순탄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리할때도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자주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높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일을 하시면, 그리고 더 깊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작업하시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여기에는 실패가 결코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겸허함과 순종의 자세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잠10:17)

17.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잠언10:17>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배의 폭 정도일 뿐입니다. 가령, 그물을 던지느냐 안 던지느냐의 차이,  던지되 오른쪽으로 던지느냐 왼쪽으로 던지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은 제자들은 이 분이 곧, 예수님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허기에 지쳐 배고파하는 이들을 위하여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12)”고 주님은 초대 하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놓고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이 둘중에, 어느것이 더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분명 우리들은 영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것,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육적인 것은 덜 중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학시절에 학교 기숙사 현관에 있던 “체력이 목회다.”라는 문구가 생각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일도 건강한 몸이 허락될때 보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육적인 것을 돌본다는 것은 영적인 사역을 위한 길을 준비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병자를 고치는 것도 안식일에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아우성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병자들을 돌보고 치료해주면 그들이 예수 자신을 더욱 괴롭히고, 더욱더 죽이고 싶어할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태복음 9:12) 하시면서 손수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럴까요? 그렇게 하셨을까요? 

안식일에만 병자를 고치지 말고, 다른 요일에 돌보고 고치셔도 되셨을텐데, 굳이 그러 하셨을까요?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참된 안식일을 지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든 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힘이 듭니다. 몸이 아프니, 안식(평안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들이 참된 안식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 즉 회복과 치유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이렇기에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돌보는 것도 중요한 사역이요 주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영적 필요를 다루시기 전에 먼저 그를 먹이십니다. 육적인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래서 옷을 말리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허기를 채우고, 인간적인 교제를 즐길 수 있는 기회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지친 몸을 돌보시는 것에 관심을 쏟습니다. 이를 위하여 사전에 손수 음식을 준비합니다. 바로 육체를 소중히 여기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40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은 우리들의 육체를 잘 돌보는 것 – 주릴 때 먹을것 주고, 목 마를때 마시게 하는 것 등 –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육적인 것이라하여 등한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조반을 베드로에게 먹인 후, 곧 육신의 몸이 회복된 이후 베드로와 의미심장한 대화를 합니다. 대화의 주제는 목양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양들을 돌보는 사명, 사람들을 돌보는 사명입니다. 

예수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 : 주여 그러하외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 : 내 어린양( 즉, 귀한 양)을 먹이라.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이러한 내용이 두 번 더 계속됩니다.

사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첫 질문을 받았을때,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했는데도, 동일한 질문을 그것도 두번, 세번 연거푸 받았을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그곳에 숨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사랑한다’고 대답은 하지만,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라기보다는, 기어 넘어가는 듯한 음성이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의 뇌리는 매우 복잡합니다. 그동안 있었던 발자취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갑니다.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끝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었는데, 여린 계집종 앞에서조차 “나는 그를 모른다”며 강하게 부인했던 기억이 그를 더 움츠리게 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완전히 기죽어 있는 그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성을 잃고 주저앉은 그를 다시 세워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으로부터 기대와 사랑을 받던 제자이었는데, 아주 꺾여져버린 베드로의 위상을 다시 높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의 종류를 물어 보기 위하여 질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반복함으로 베드로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단 한가지 이유입니다. 바로 베드로의 위상을 높이려는 것, 회복해주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세 번, 예수에 대한 고백을 요하셨습니다. 이전에 세 번,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 내용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그에게 맡긴 사명, 양들을 돌보고, 케어해야 하는 사명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의무이며 사명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말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이 등장한 것은 이단들이 자꾸 생기니까 이것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강력한 지도자 개념을 도입한 2세기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신약 성경 입장에서 보면, 목사와 평신도는 본질이 아니라, 그 기능에 의해서만 구분 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에게 맡긴 목양의 사명, 양들을 돌보는 사명은 모든 크리스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우리들 모두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의무이며, 사명인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OO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삶과 사역에 대해 모든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자신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크나큰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막,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 마음, 새 결심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베드로는 즐거움과 소망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바로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죽음, 순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랬을까요?

우리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죽음의 가능성에 늘 직면하고 있다는 표현이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때 아닌 사고 혹은 여러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쇼핑하다가도 얼굴 조차 모르는 사람이 쏘아대는 총에 맞기도 합니다. 

죽음은 결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수시로 우리들을 찾아와 괴롭힙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태권도, 쿵후, 킥복싱과 같은 유단자가 아닙니다.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는 사람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라며 <죽을 각오하고> 덤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면, 죽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고 죽기살기로 덤비는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를 따랐다는 이유로 예수가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실때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봐 두려워서 꽁꽁 숨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성령이 임한 이후에는 죽음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 했습니다.

왜, 이렇게 확~ 바뀐것일까? 바로 죽음의 공포,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을 때야 살아갈, 그리고 섬길 준비가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나를 따르라!”(22) 이 말은 “나 따르기를 계속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따라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만 바라보며 잘 걷다가 눈을 돌려 바람과 파도를 보는 순간 곧바로 물에 빠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잘 따랐을때에는 풍랑이는 물 위도(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주님 대신 환경을 바라보는 순간  풍랑 속에 잠겨 버렸습니다. 

베드로. 그는 주님을 즉시로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만을 바라보던 시선을 주변 환경으로 쉽게 돌렸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21장 마지막을 봐도,  “나를 따르라!”(22)는 말씀에 새롭게 헌신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베드로였지만 금새 (환경을) 바라보며 마음을 빼앗기는 모습이 다시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누군가가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을 함께 따르는 요한 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21)  다시말해, “지금 주님은 앞으로 나,               베드로에게 일어날 일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이 요한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할 일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따르는 것임을 상기 시켜 주십니다.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주님만 보이던  우리의 시선에 다른것이 보이기 시작할 때, 이 때가 조심을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때문에, 환경때문에, 다른 사람 때문에 십자가 대신 (다른것에) 마음을 쏫는다면, 그리고 예수 대신 다른 것에 나의 정신과 생각에을 빼앗긴다면 이것은 베드로가 환경(물속)에 빠진 것처럼 내 마음을 쏠리게 한것, 내 생각을 몰입하게 한것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눈)을 오직 주님께로만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 하십니다.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베드로는 베드로이고, 요한은 요한이다’입니다. 우리들은 각자만의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로서 행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각 가정은 그 가정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남들을 바라보며,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오직 우리의 시선은 십자가에만 고정시키면 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주께만 가 있으면 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입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우리들의 시선을 남이 아닌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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