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길(막 8:34-35)
토론토순복음영성교회(김석재 목사)
가룟 유다는 예수를 몰랐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 곁에 있었고, 말씀을 들었으며, 제자로서 사역에도 참여했었던 자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졌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관계’보다 ‘계산’을 선택한, 오래된 마음의 방향에서 생겼고 배신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알아야 할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배신은 멀어질 때 시작되지 않는다. 곁에 있으면서, 마음이 떠날 때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주님 곁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마음은 이미 다른 계산을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가룟 유다는 분명히 제자였다. 금고를 맡았던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제자의 길을 끝까지 걷지 않았고 배신했다. 이렇게 볼 때 제자도는 시작의 열심이 아닌 끝까지 남는 충성으로 증명된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익이 될 때만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을 때도 주님의 길을 신뢰하며 따르는 선택을 말한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쯤 와 있나?
우리 모두 “나는 지금도 끝까지 따르겠다는 고백 위에 서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가룟 유다가 왜 배신했는지 생각해 보라. 단지 돈 때문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기대한 예수’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사이의 간격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따르던 예수께서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자, 그는 순종 대신 실망을, 신뢰 대신 계산을 선택했다. 신앙은 언제나 이 질문 앞에 서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있는가? 가룟 유다의 가장 큰 비극은 배신 그 자체가 아니라, 회개 대신 절망을 선택한 데 있었다. 베드로도 부인했고 통곡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로 돌아갔다. 유다도 울었지만, 그 눈물은 은혜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회개 대신 양심에 반한 것에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이 말은 죄 이후의 태도가 사람의 인생을 가른다는 말이다. 눈물 뒤에 절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은혜로 돌아갈 것인가? 신앙의 갈림길은 항상 실패 이후에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의 이름은 부끄러운 상징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제자의 길을 어떻게 가고 있는가? 명심하라. 한 제자의 실패 속에 감춰진 믿음과 배신의 긴장, 그리고 회개의 문을 다시 여는 은혜의 길. 유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후회(메타멜레이아)’가 아닌 ‘회개(메타노이아)’로 가는 진실된 제자도의 길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제자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 훈련받는 자, 스승을 따르는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신자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예수님이 원하는 훈련을 받아야 제자라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들여다보면 신자는 많으나 제자가 적다는 말이 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님의 제자 곧 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적다는 말이기도 하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서도 예수님이 가르치고 원하는 훈련을 원치 않는다. 예수님을 그냥 지식으로만 알기 원한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으로는 풍성한데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는 제자와 거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마다 제자 훈련들은 빠지지 않고 가르치는데,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볼 수 없다. 왜 그럴까? 왜 예수님 닮기를 원한다면서 왜 닮지를 못하는 것일까?
제자의 길은 때론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르는 길이다. 그렇지만 그 길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요, 영광의 길이다. 그러므로 막연히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정직한 제자가 돼야 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는 제자의 길이란 무엇일까? 제자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첫째, 제자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
세상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따라가고 있다. 세상의 부귀영화, 명예 그리고 자신이 이루고 싶은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몸부림치며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 생각해 보라.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값비싼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세상 사람들이 좇는 것을 좇으며, 그들이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라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도 더 악하고 어둡고 더러운 것을 좇으면서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라.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똑같이 명예나 권력, 물질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죽은 교회, 죽은 그리스도인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연히 예수님과 함께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값비싼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하나님께서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신 결과로 주신 헤아릴 수 없이 큰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값비싼 은혜를 잊어버리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과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며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만 한다. 그래서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아가고, 가르침을 지켜 행하며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제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겸손하셨던 것처럼 겸손해야 하며, 예수님께서 온유하셨던 것처럼 온유해야 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신 예수님처럼 마음을 다해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웃을 섬길 수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하며, 온유하여 마음을 다해 긍휼과 자비로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없이는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라.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하기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시면서 네 이웃을 그와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랑하는 것을 나 자신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음을 기억하라. 나밖에 모르는 마음을 비우라.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라.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가룟 유다의 계산적인 마음을 보라. 이 마음은 그를 배신의 길로 인도했다. (요12:1-6)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이 말씀에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지금 잔치가 벌어진 곳은 얼마 전 죽어 무덤 속에 묻혔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기뻐하며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잔치를 베푼 자리였다. 그 자리에 전에 귀신에 들렸던 마리아가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다 예수의 발에 부었다. 순전한 나드 한 근에 대해 값어치를 따져보면 쉽게 말해 삼백 데나리온으로 1년치 품삯에 해당한다. 그 엄청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는다니 얼마나 큰 낭비냐는 말이다.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못하고, 그런데 성경은 그 생각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 모두 자기 생각, 지식, 감정, 의지와 계산까지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참 제자가 되라. 그 길만이 성공과 형통이 있고, 참된 평안과 안식이 있다. 그 길 끝에 영원한 천국과 상급, 그리고 주님의 칭찬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주님에게만 인정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와 줄기를 말씀하시며 제자의 길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과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가 된다 하셨다. 이제 믿음으로 열매를 맺고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라.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으로 인해 맺는 열매로 주님께 인정받아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
둘째,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비우며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일부가 아닌 나의 전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종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환경도 아니고, 자신이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아니하고 바로 자기 자신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의 뜻, 나의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내 주장이 불거져 나온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데 내 명예를 드높이고 싶은 생각이 앞선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도 어느새 나의 일에만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온전히 이루어지지도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과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툭툭 불거져 나오는 자존심,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욕심, 자기 자랑, 미움, 섭섭한 마음, 원망 불평을 다 버려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며, 내 삶의 모든 결정권과 소유권이 오직 예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다 맡기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버리고, 포기하였기에 매 순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자기 자신의 삶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바울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사신 것이기에 자신을 위해 몸 버리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였다.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핍박했고, 예수님을 철저하게 깨뜨리며,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위해 일하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들을 잡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사명이요 충성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예수님을 위해 충성하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죽기까지 복종한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깨달은 것은 하나님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자기를 비어 자기를 부인하므로 철저하게 자기를 낮춰 말씀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도 자기를 철저히 비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했건만 나는 무엇이며 내가 무엇이길래 내가 예수님 앞에 드러낼 것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비우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력, 재능, 능력, 자신의 명예와 재물을 의지하며 자기 계산대로, 자기 유익에 따라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아무런 능력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고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다 보니 세상보다 더 악하고, 더 세상적이고, 더 타락하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교회와 성도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주님을 믿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할 수 있나? 주님이 주지 아니하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있나? 지금 우리 모두의 인생에 주님이 개입하셔서 하늘 문을 여시면 누구도 닫을 자가 없고, 하늘 문을 닫으시면 누구도 열 자가 없는 것을 깨달아 아는가?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생명, 명예, 재물, 재능, 학식, 건강, 자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예수님과 함께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라. 그런데 이러한 자기 부인은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될 때 비로소 철저하게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능력을 따라가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님을 의지해 살면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렇게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고 살아갈 때라야 성공해도 교만하지 않고 실패해도 비굴하게 되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고 함께 할 때 온갖 탐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겠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랑과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성령의 열매로 가득 찬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할 때 오직 예수님만 따르며 예수님을 나타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제자의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자기 십자가’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내가 감내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다 보면 예수님과 함게 하는 제자이기에 당하는 핍박과 순교,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과 슬픔 등이 너무 많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희생하고 손해를 봐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십자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는 손해가 따르고, 핍박이 넘쳐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기억하라. 주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은 백배를 얻는 길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처자와 형제를 잃고 전토를 잃으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100배나 갚아 주시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천국으로 오르지 못할 자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내 삶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께서 100배나 갚아주시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먼저 믿어야 한다. 믿지 못하면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세상과 마귀의 일을 버려야 한다. 세상과 마귀를 안고 천국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세상과 마귀를 먼저 단호히 버리라. 여기서 세상을 버리라는 것은 이 세상 정신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 세상 정신이란 하나님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잊어버린 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 욕심과 탐욕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이 세상 정신에 따라 살면 음란과 부정부패, 사리사욕 등의 풍습에 젖게 된다. 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세상을 버리라는 말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천국을 함께 갖지 못한다. 먼저 우리가 세상을 버려야 천국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마귀를 동시에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마귀의 일을 버려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다.
마귀와 하나님이 같이 할 수 없고 성전과 우상이 함께 못하며 빛과 어두움이 같이 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 믿는 사람의 사는 방식과 믿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함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내게 지워진 십자가를 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 혹시 하나님의 일 감당하기가 고생스럽다며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여 달아나거나 다른 사람에게 슬그머니 떠넘기고 있지는 않는가? 오로지 편안한 삶만 추구하며 도망 다니고 있지는 않는가? 내 사명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지는 않았나? 사명을 잃어버린 인생은 불행한 인생이다. 그러나 사명이 있는 인생은 고난을 당해도 행복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라.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라.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으며 약속된 천국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제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어 인생의 전부가 되시는 주님을 인정하고 삶을 통해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증거하는 성도가 되라
넷째, 제자의 길은 복음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내놓는 삶.
본문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표현은 생명을 다해 헌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십자가의 길을 버리면 결국 영원한 생명마저도 잃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사랑과 자기 안에 있는 세상 욕심을 부인하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고 영원한 생명도 얻게 된다.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 가족이나 직업을 포기하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포기해야 할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재판관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황제 만세’를 외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단 한마디 말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말 한마디로 삶의 질이 달라졌다. 그래서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다. 반면 수많은 성도는 십자가를 지고 처형당할 각오를 하고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희생을 영생으로 갚아 주셨다. 그들이 흘린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아 결국 로마는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되었다.
프랑스에 ‘광야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 이 박물관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개신교 박해를 피해, 성도들이 들판이나 산지에 비밀리에 모여 예배드리면서 생겨난 역사 현장과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박물관이다. 당시 예수님을 믿다 붙잡힌 성도들은 온갖 고난을 겪으며 추위와 굶주림 속에 죽어갔다. 남자들은 노예선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노를 저어야 했다. 이 박물관에는 파선된 노예선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조그만 나무판이 전시돼 있는데, 거기에는 이와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제 손목의 쇠고랑을 당신과의 혼인 반지로 삼게 하시고 제 발목의 쇠고랑을 당신의 사랑의 사슬로 여기게 하소서”
믿음의 선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순교까지도 기꺼이 감당했다. 그렇게 값진 순교는 지금의 우리가 있게 만들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로서, 순교자적 정신을 가지고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제자의 삶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넘어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한다. 이러한 결단으로 참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길 기대하며 간절히 부탁한다. 그러기 위해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세례 받기 전의 제자들과 성령세례 받은 후의 제자들은 너무나 달랐다. 성령세례 받기 전의 제자들은 주님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들이었지만, 성령세례 받은 후의 제자들은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진정한 제자들이었다. 성령세례 받기 전의 제자들은 예수님만 안 계시면 기도해달라고 온 사람들과 논쟁하기 일쑤였지만 성령세례 받고 난 후의 그들은 목숨도 아끼지 않았고, 병자가 눈에 띄면 논쟁이 필요 없이 즉시 기도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내놓고 예수님을 증거할 때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따른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걸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세상의 고통과 신음 소리를 듣게 되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반응하며 예수님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성령의 능력을 입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수님을 따라가며 목숨 바쳐 충성하라.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주의 일에 헌신하고 주님을 온전히 섬기라. 그러한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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