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설교 (7), 두 문화 이음

설교 (7), 두 문화 이음

다리는 강이나 계곡으로 단절되었을 두 장소를 연결하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다리는 그것  없이는 불가능했을 교통의 흐름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설교에서) 협곡이나 심연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리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무엇일까요? 심연은 성경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의 깊은 균열입니다. 1955년에 출판된 유명한 에세이에서 스노우 경은 “두 문화,” 즉 과학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문학과 과학 지식인들 사이의 점점 더 멀어지는 소외를 한탄했습니다. 그는 두 문화 사이의 “상호 이해의 심연”에 관해 말했습니다. 현대의 두 문화 사이의 심연이 그렇게 크다면, 그 두 문화와 고대 세계 사이의 심연은 훨씬 더 큽니다.  2천 년 동안 변화해 온 문화 (구약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라는 넓고도 깊은 간극을 가로질러 기독교 전달자들은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가 성경을 통해 오늘날 사람들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은 설교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존 스토트가 사용한 비유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의미와 메시지가 담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를 망라하여 전 인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는 성경에 귀 기울여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1500년 이상을 다양한 상황에서 살았던 실제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어휘로 표현되었고 그 시대의 문화와 상황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전에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이 그 말씀을 들어야 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시간적 으로나 사상적으로 그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성경 시대의 메시지를 오늘 우리 상황에 적합한 메시지로 전환하여 전달하는 것은 설교자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은유적으로 “다리 놓기 Bridge-Building”로 표현합니다. 성경의 영원한 타당성을 확신 있게 전달하기 위해 설교자는 두 개의 다리를 놓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첫번째는 성경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의 간극입니다. 성경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에는 아직 메워지지 않은 간극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사실 설교자들은 오랫동안 다리를 놓아오고 있습니다. 역사적 특수성이 담겨져 있는 성경의 메시지를 자신들의 특정 문화와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져 왔습니다. 기독교는 매 세대마다 이전 세대의 노력을 이어 받았고 후대 세대에게 전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세대마다 그 심연의 넓이와 새로운 다리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은 절박합니다. 다리를 놓지 않는다면, 성경을 설교하지만 청중들은 그 메시지에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스펄전은 새로온 상황과 문화에 관심 없이 기독교 교리의 세세한 부분에 집착하는 설교자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폭로합니다. 어떤 이들이 천년왕국 이전과 이후의 계획들과 같은 교리들을 아무리 중요하게 여길지라도, 바느질을 해서 일곱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경건한 과부에게는 사실상 아무 관심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녀에게는 이러한 심오한 신비들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훨씬 더 듣고 싶어 합니다. 복음의 영원한 타당성은 오늘 청중의 상황에 연결시켜야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가 현재 인간의 필요나 현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데만 몰두하게 되면 성경의 진리를 간과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자기 이해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다 보면, 하나님보다는 유행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포퓰리스트”나 현대의 거짓 선지자가 되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다리를 건설할지는 시대정신이나 시대사조 (時代思潮) 보다는 성경적 계시에 따라 결정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소명은 세속주의에 도전하는 것이지, 세속주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우리 주변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와 분별이 요구됩니다. 

   두번째는 기독교 세계와 세속 세계의 간극입니다. 원시 교회 설교자들은 세속 문화들의 의견들이 기독교에 편승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문화의 어휘와 개념을 무시하거나 폄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문화권 사람들의 희망, 두려움, 그리고 열망을 이해하고 긍정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전달자들은 그들  문화의 질문들을 재구성하고, 우려를 재형성하고, 그리고 희망의 방향으로 돌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에는 이 원리가 잘 나타납니다. 그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청중의 다양한 문화에 조율시켜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각 상황에 맞게 어휘와 발성뿐만 아니라 감정 표현과 추론 방식, 예화와 설교 형태까지 바꾸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논증 방식에도 변화를 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청중들의 세속적 문화를 반박하는 것 대신에, 오히려 그들에게 확신을 주고자 고민하고 애썼습니다.

    바울은 생소한 것이 아닌 익숙한 어휘와 주제들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아테네에서 행한 설교에서 바울은 이방인들도 수용할 수 있는 방식 으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는 유대인이나 혹은 이방인 중에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자들”에게 설교할 때는 그들이 익숙한 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교양있는 자들에게 설교할 때는 “너희 시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라고,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다른 문화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접촉 요소”를 선별해서 선택합니다. 청중의 관심, 소망, 그리고 필요에 관한 긍정과 동의점들을 찾아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 청중이 이해하도록 두 세계의 다리 놓기는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더 근본적으로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흉악한 현실을 밝히 드러내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요, 의로움이요, 거룩함이요, 또한 구원이다”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의 황제”란 별명을 가졌던 스펄전은 설교에 관해 강의할 때는 언제나 동일한 영광스런 주제로 돌아갔습니다. “형제들이여, 언제나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전파하십시오. 그분은 온전한 복음입니다. 그분의 인격, 직분, 그리고 사역은 우리의 위대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구주와 그분께 이르는 길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타락한 인간의 공허함을 채우시고, 우리의 어둠을 밝히시고,  신성의 모든 충만함으로 우리를 풍성케 하십니다. 이남규 목사

설교 (7), 두 문화 이음

다리는 강이나 계곡으로 단절되었을 두 장소를 연결하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다리는 그것  없이는 불가능했을 교통의 흐름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설교에서) 협곡이나 심연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리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무엇일까요? 심연은 성경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의 깊은 균열입니다. 1955년에 출판된 유명한 에세이에서 스노우 경은 “두 문화,” 즉 과학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문학과 과학 지식인들 사이의 점점 더 멀어지는 소외를 한탄했습니다. 그는 두 문화 사이의 “상호 이해의 심연”에 관해 말했습니다. 현대의 두 문화 사이의 심연이 그렇게 크다면, 그 두 문화와 고대 세계 사이의 심연은 훨씬 더 큽니다.  2천 년 동안 변화해 온 문화 (구약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라는 넓고도 깊은 간극을 가로질러 기독교 전달자들은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가 성경을 통해 오늘날 사람들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은 설교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존 스토트가 사용한 비유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의미와 메시지가 담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를 망라하여 전 인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는 성경에 귀 기울여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1500년 이상을 다양한 상황에서 살았던 실제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어휘로 표현되었고 그 시대의 문화와 상황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전에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이 그 말씀을 들어야 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시간적 으로나 사상적으로 그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성경 시대의 메시지를 오늘 우리 상황에 적합한 메시지로 전환하여 전달하는 것은 설교자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은유적으로 “다리 놓기 Bridge-Building”로 표현합니다. 성경의 영원한 타당성을 확신 있게 전달하기 위해 설교자는 두 개의 다리를 놓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첫번째는 성경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의 간극입니다. 성경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에는 아직 메워지지 않은 간극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사실 설교자들은 오랫동안 다리를 놓아오고 있습니다. 역사적 특수성이 담겨져 있는 성경의 메시지를 자신들의 특정 문화와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져 왔습니다. 기독교는 매 세대마다 이전 세대의 노력을 이어 받았고 후대 세대에게 전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세대마다 그 심연의 넓이와 새로운 다리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은 절박합니다. 다리를 놓지 않는다면, 성경을 설교하지만 청중들은 그 메시지에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스펄전은 새로온 상황과 문화에 관심 없이 기독교 교리의 세세한 부분에 집착하는 설교자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폭로합니다. 어떤 이들이 천년왕국 이전과 이후의 계획들과 같은 교리들을 아무리 중요하게 여길지라도, 바느질을 해서 일곱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경건한 과부에게는 사실상 아무 관심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녀에게는 이러한 심오한 신비들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훨씬 더 듣고 싶어 합니다. 복음의 영원한 타당성은 오늘 청중의 상황에 연결시켜야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가 현재 인간의 필요나 현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데만 몰두하게 되면 성경의 진리를 간과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자기 이해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다 보면, 하나님보다는 유행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포퓰리스트”나 현대의 거짓 선지자가 되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다리를 건설할지는 시대정신이나 시대사조 (時代思潮) 보다는 성경적 계시에 따라 결정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소명은 세속주의에 도전하는 것이지, 세속주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우리 주변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와 분별이 요구됩니다. 

   두번째는 기독교 세계와 세속 세계의 간극입니다. 원시 교회 설교자들은 세속 문화들의 의견들이 기독교에 편승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문화의 어휘와 개념을 무시하거나 폄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문화권 사람들의 희망, 두려움, 그리고 열망을 이해하고 긍정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전달자들은 그들  문화의 질문들을 재구성하고, 우려를 재형성하고, 그리고 희망의 방향으로 돌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에는 이 원리가 잘 나타납니다. 그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청중의 다양한 문화에 조율시켜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각 상황에 맞게 어휘와 발성뿐만 아니라 감정 표현과 추론 방식, 예화와 설교 형태까지 바꾸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논증 방식에도 변화를 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청중들의 세속적 문화를 반박하는 것 대신에, 오히려 그들에게 확신을 주고자 고민하고 애썼습니다.

    바울은 생소한 것이 아닌 익숙한 어휘와 주제들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아테네에서 행한 설교에서 바울은 이방인들도 수용할 수 있는 방식 으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는 유대인이나 혹은 이방인 중에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자들”에게 설교할 때는 그들이 익숙한 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교양있는 자들에게 설교할 때는 “너희 시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라고,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다른 문화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접촉 요소”를 선별해서 선택합니다. 청중의 관심, 소망, 그리고 필요에 관한 긍정과 동의점들을 찾아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 청중이 이해하도록 두 세계의 다리 놓기는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더 근본적으로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흉악한 현실을 밝히 드러내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요, 의로움이요, 거룩함이요, 또한 구원이다”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의 황제”란 별명을 가졌던 스펄전은 설교에 관해 강의할 때는 언제나 동일한 영광스런 주제로 돌아갔습니다. “형제들이여, 언제나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전파하십시오. 그분은 온전한 복음입니다. 그분의 인격, 직분, 그리고 사역은 우리의 위대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구주와 그분께 이르는 길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타락한 인간의 공허함을 채우시고 신성의 모든 충만함을 채워주십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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