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보다 상태_렘 28:1-11

김유인 목사 (밴쿠버디렉션교회)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지난 9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왕족, 귀족, 기술자들, 성전 기구 일부를 빼앗겼습니다. 이미 포로는 진행 중이지만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런 분열된 현실이었습니다.

이 긴장 속에서 성전 안에서 두 선지자의 메시지가 정면으로 충돌하며 대립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백성들이 죄악의 길에서 불순종했기 때문에 나라가 멸망할 것이고, 결국 바벨론이 그들을 통치할 것이라고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며 심판과 회개를 선포해 왔습니다.

반면에 “평안하다! 걱정할 것 없다!”면서 예레미야와는 정반대를 주장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과 빼앗긴 성전의 기구들을 하나님께서 2년 안에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예언이 정면충돌합니다. 문제는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권위를 들고 나왔다는 점입니다. 내용은 다른데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이 참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 말씀처럼 ‘하나님’이라는 수식이 붙게 되면 구분이 어려워집니다. 전혀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데 서로가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반된 가치관으로 살아가는데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말합니다.

내용은 다른데 둘 다 출처가 하나님이라면 무엇이 과연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황’과 ‘상태’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지금 남유다의 실제 현실이 어떠합니까? 왕과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떠나 죄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불순종하고 우상숭배가 창궐했습니다. 도덕과 영적 죄악이 극에 달했습니다.

예레미야서 5:27-31은 이렇게 말합니다.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지금 온 나라에 평화와 번영의 복음이 외쳐지고 있고, 넘쳐나는 예물이 예배 가운데 드려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는 전혀 근거가 없는 낙관적인 메시지를 선지자들이 선포한다는 점입니다. 윤택을 추구하는 백성들에게 영합하여 거짓 평안을 선포하고, 그렇게 주어진 권력을 종교 지도자들이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 시기에 오직 ‘묻지마 평화, 묻지마 소망’을 전합니다. 그냥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말만 전합니다. 그리고 그 평안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백성들은 값비싼 예물을 바치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사이비 교주들만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에 몰려가는 사람들이 항상 억울하고 불쌍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에, 그런 곳에 열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말을 교주들이 해 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이 그 권력으로 다스리며, 백성들은 그것을 또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모든 관점이 ‘상황’에 머물러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이 좋은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거야!”라고만 말합니다. 온통 관심이 ‘상황’을 바꾸는 데에만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를 바꾸는 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상황’을 통해 우리의 ‘상태’를 온전하게 하시는 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의 많은 스토리는 우리의 신앙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애굽은 우리의 죄된 상태를 설명하고, 광야는 죄가 계속 우리를 괴롭히는 상태를 설명하며, 가나안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가 계속해서 유혹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태를 바꾸지 않고 상황에만 집중하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애굽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은 몹시 힘듭니다. 광야에서 넉넉한 물과 먹거리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은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가나안에서 그들의 문화를 멀리해야 하는 상황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만족함이 없고 계속해서 그 상황 때문에 힘들어하며, 더 나은 상황을 위해 하염없이 찾아 헤매게 됩니다.

하나냐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상황 힘들지? 알아! 조금만 참아! 제사만 잘 드리면 하나님이 더 좋은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거야.” 백성들이 듣기에 너무 좋은 말이며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3:23에서 예수님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고 책망하십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제사, 예배를 드리는 상황은 이루어졌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상태를 버렸다고 지적하십니다. 이어지는 28절을 보면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한다. 겉보기에 그럴듯한 예배와 신앙의 상황은 연출해 내고 있지만,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그토록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구제도 하는 그럴듯해 보이는 신앙생활의 상황은 있지만, 실제 그들의 신앙 상태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나 하나냐, 둘 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했지만 서로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냐는 그저 “상황이 좋아지면 다 좋아진다”였고, 예레미야는 “완악해진 상태를 위해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소망이 없다”를 선포했습니다. 진리를 왜곡시키는 거짓 선지자는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통 상황만 좋아지기를 바라는 수요자가 많아지면, 거짓 공급자도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상태의 변화이지, 상황의 변화가 아니다!”라는 것을 제대로 안다면, 그냥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에 무턱대고 아멘하며 환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봉사하고 헌신했더니, 상황이 해결되고 좋아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라는 식의 간증이 그래서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상태의 변화보다 상황만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교회라는 이름, 똑같은 목사, 똑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절대로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우리 가운데 있고, 알곡과 가라지(진짜와 가짜)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교회 안에 섞여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보십시오. 초대교회는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 교사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신앙의 상태는 뒷전에 두고 온통 자신의 상황만 나아지기를 넋 놓고 바란다면 누구나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에 대해 엉뚱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은 절대적이며 영적인 차원의 복입니다. 곧 신앙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의 복을 상대적이며 물질적 차원의 복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혼돈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상대적으로 좋은 상황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좋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가장 복된 상태, 그 절대적으로 좋은 상태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하나님과 가까이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위로를 받는 그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믿음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상황이 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들이 절대적인 영적 차원의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은혜이고 모든 것이 축복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상태가 충만하기 때문에 고난도 실패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과연 큰 하우스입니까? 아니죠. 엄마의 품입니다. 상황이 비록 허름한 집이라 할지라도 엄마의 품에 안긴 상태가 아이에게는 절대적인 축복입니다.

여러분, 상황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편리한 상황은 만들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의 상태가 여전히 나빠지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여전히 상황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공부를 더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힘든 상황을 다 바꾸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상황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축복하고 격려하는 이야기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반면에 자신의 신앙 상태를 변화시키라는 말에 대해서 듣는 척은 하겠지만 보통은 듣기 싫어합니다. “지금 당신의 영적 상태를 바꾸라!”는 말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태의 변화는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상태부터 바꾸어야 해. 네 신앙의 상태가 변화되어야 한다.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은 너의 상태를 온전케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상황에 머물지 말고 상태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때부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나와의 싸움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외부적인 상황 탓하는 것을 멈추고 기도하러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허락하신 상황에서 내 상태를 직시해야 합니다. 상황에 주저하지 않고 말씀 앞에 나를 비추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모든 상황을 무시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좋은 상황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현장에서 예배할 수 있는 상황은 너무 귀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예배하는 상황에 내가 있으니까 내 신앙 상태도 자동으로 좋아진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 교회 사람들이 좋아서, 그 교회 문화가 좋아서, 그런 상황에 머물고는 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라면, 내 상태는 안 바꾸고 그 상황만 누리겠다면, 

그렇게 신앙의 상태는 변화 없이 종교적인 상황만 누리는 것을 성경은 거짓 신앙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을 출처로 내세우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를 때, 어떻게 분별할까 혼돈스러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상황보다 상태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상황의 변화보다 신앙 상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시면 가짜와 진짜가 보일 것입니다.

어느 누가 2년 만에 회복된다는 하나냐의 메시지보다 70년 만에 회복된다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더 선호하겠습니까? 그런 상황을 누가 선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 상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때로는 어려운 상황을 허용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참되고 복된 일입니다.

그때 상황만 바라보지 마시고,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42편의 배경을 보자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다윗이 신발 벗고 눈물 흘리며 도망가는 상황, 아들이 반역하여 아버지를 죽이려는 상황, 아마도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실제 다윗의 상황은 말도 안 되는 어려운 상황, 불안한 상황, 낙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너 하나님 믿는다면서 네 아들이 지금 반역하느냐? 꼴 좋다. 그게 예수 믿는 것이냐? 교회 다니는 결과가 과연 그런 것이냐? 너 크리스천이라면서, 그런데 너 지금 상황이 아주 볼만하구나.” 

상황만 바라보면 당장 죽어도 될 상황입니다. 상황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어지는 다윗의 고백이 무엇인가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꽉 막힌 최악의 상황에서 이 상황을 당장 해결하려 들지 않고, 이 상황을 통해 내 신앙의 상태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도록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지금 어떻습니까? 상황이 좋습니까? 그래서 그 상황에서 계속 머물고 싶고 조금 더 좋은 상황이 목표입니까? 아니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까? 그래서 제발 이 상황이 더 좋아지기만을 바라십니까?

우리가 처한 상황, 네, 중요합니다. 그러나 상황보다 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처한 각양각색의 상황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상태가 거룩해지길, 신실해지길, 성숙해지길 바랍니다. 상대적인 상황들을 통해 절대적인 영적 상태가 회복되는 축복을 누리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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