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싹이 보인다(싹수)
드디어 캘거리에도 봄이 오고 있다. 봄은 희망을 가져다준다. 더불어 온갖 꽃들이 두터운 땅속을 비집고 나와 싹을 트이고 있다. 할미꽃이나 버팔로 빈처럼 벌써 아름다운 꽃을 만개한 경우도 있고 이제 움트는 꽃들도 있다. 이때 싹을 보게 되면, 건강하게 자랄지 아닐지를 알 수가 있다. 집안에서 키우는 화초들도 다르지 않다. 햇볕이나 수분 등 영양분이 부족하거나 하면 잎이 금방 노랗게 변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잠시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나이 사십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링컨이 말했다. 백악관 인턴 면접을 하는 과정에서 링컨이 비서진에게 한 말이다. 어떤 사람의 얼굴 또는 사진을 보더라도 그 사람의 인생 역정이 어느 정도 얼굴에 배어있게 마련이다. 창세기에 바로와 야곱의 대화가 나온다. “네, 나이가 얼마냐?”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나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한국에서 교회학교 교사로, 캐나다에서는 데이 캐어 교사로 오랫동안(25년)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의 성격과 태도를 보면 그 부모의 모습이 그대로 연상이 된다. 언행이나 성품이 좋은 아이들은 그 부모도 다르지 않다. “Children see, children do!”라는 격언이 있다.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부전자전, “부모를 보면 자녀를 알 수가 있다.”. 아이들에게 흔히 하는 말 중에, 저 아이는 “싹수가 있어” 또는 “싹수가 없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싹’+’아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싹’은 말 그대로 풀 같은 것의 싹이고 ‘아지’는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등 ‘새끼’의 뜻으로 이것이 ‘싸가지’로 변하였다. 싹수와 마찬가지로 욕하는 말이다. 비록 표준어는 아니지만 거의 전국적으로 통용된다.” 즉 “싹수가 없다.”는 말은 “싹이 안 보인다.”, “가망이 없다.”는 말로로 통한다.
상식적인 선을 넘어선 태도와 언행이 문제가 된다. 예의가 없거나 미성숙한 경우로 볼 수도 있다. 비슷한 말로 “싹수가 노랗다.”. 또는 “싸가지가 없어”라는 말도 통용된다. 아이 때 들어도 기분이 좋지 않을 터인데, 나이가 들어서 듣는다면 “인간관계”를 잘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어떤 평판을 듣고 싶어 할까? 당연히 나쁜 평판보다는 좋은 평판을 원할 것이다. 예의가 있거나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뒷담화나 싹수없는 말을 절제하거나 하지 않는다. 어느 공동체를 가봐도 싹수가 없거나 싹수가 노란 사람이 한둘은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으니 말이다.
필자는 그 사람의 성품과 태도를 많이 보는 편이다.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예의 바르다. 신앙생활도 잘 한다. 남 탓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할 일에만 최선을 다하고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데이캐어를 운영할 때 스토리다. 어떤 상급 학생이 자신보다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함부로 대하고 때리는 일이 발생했다. 몇 차례 주의를 주어 봐도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모에게 말했더니, 그 부모 왈, 자신의 아이는 절대로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끼리 그럴 수도 있지 뭔 대수냐”고 당연시하는 그 부모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배운다. 싹수가 좋은 아이들은 부모들도 예의가 밝고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잘 가르치자. 어릴 적 잘 배운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남다르다. 싹수가 있다. 상식적으로 행동한다.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느 곳을 가든지 인정을 받고 환영을 받는다.
자녀들이 잘못되면 부모의 탓이다. 성도가 잘못되면 영적 리더의 탓이 크다. 변명하지 말자. 내로 남불하지 말자. “이현령비현령” 궤변만 늘어놓지 말자. 내가 속한 자리에서 함께 존중하고 조금 희생하고 함께 나누고 그것이 상생이다. 상생은 성숙한 태도를 가진 자들이 갖는 바른 태도다. 싹수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이진종 <시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