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트가 발견한 예수, 인류 최고의 원형
— 칸트의 기독론
칸트는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빗나간다. 그는 예수를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나 위대한 도덕 교사 정도로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독교처럼 예수를 죄인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mediator)나 대속자(redeemer)로 고백하지도 않았다. 칸트에게 예수는 온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장 완전한 ‘인간의 원형(Urbild/archetype)’이었다.
선과 악의 투쟁, 그 한복판에 선 인간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제2논고는 ‘인간에 대한 지배를 둘러싼 선한 원리의 악한 원리와의 투쟁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칸트는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개인이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선을 고양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우리 안에서 대립적으로 작용하는 악의 원인을 무찔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에베소서 6장 12절을 인용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칸트의 해석은 이렇다. 우리는 단순히 자연적 경향성(살과 피)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규명할 수 없는 악의 원리들과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기는 첫 번째 방법은 악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창조의 목적: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류
칸트는 자신의 목적을 이렇게 선명하게 밝힌다. ‘인류가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오직 세계를 창조한 신의 뜻이고 동시에 창조의 목적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칸트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인류 전체의 도덕적 완성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이 충족될 때, 행복은 최고 존재자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 완전한 인간의 원형
바로 이 원대한 계획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칸트가 제시한 것이 예수다. 칸트는 예수라는 이름 대신 다양한 표현을 사용한다. ‘신의 독생자의 아들’, ‘참 인간’, ‘완전한 인간성의 현시’, ‘복음의 교사’, ‘인간성의 원형’ 등이다. 이 모든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하나다. 예수는 온 인류가 본받고 따라야 할 가장 완전한 인간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 원형에 대해 놀라운 표현을 쓴다. 유일하게 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영원부터 신 안에’ 있었고, 그는 처음부터 말씀이었으며 그 말씀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의 마음씨(Gesinnung)를 받아들일 때, 인류는 신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원형이 어떻게 인간들과 함께하게 되었는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원형이 하늘에서 인간의 몸을 취하여 강림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신의 아들의 낮춤(빌 2:6-8)을 통해 인간이 그에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천적 신앙의 세 단계
칸트는 예수를 본받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거룩하듯이 너희 품행이 거룩해야 한다'(마 5:48). 둘째, 신의 나라를 마음에 두고 끊임없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라(마 6:33). 셋째, 악에서 벗어나 선으로 들어서는 회심을 통해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벧전 2:24).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에 대한 경고
이어서 칸트는 기적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선한 품행보다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 불신앙이라고 했다(요 4:48). 대부분의 기적은 악마적 기적으로서 선한 일을 방해한다고 경고했고(마 4:8-9), 기적을 기대하는 신앙은 이해해야 할 것을 너무 일찍 포기하게 만들어 결국 이성적 믿음을 파괴한다고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칸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그것은 예수가 어떠한 도덕적 결점도 없이 태어난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인류의 어떤 철학자보다 더 순수한 지혜를 가진 참 인간이 하늘에서 온 것처럼 나타났다는 것이다.
죽음 직전의 아편
칸트는 삶의 변화 없이 오직 성례의 형식만을 이용하려는 행태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죽음 직전에 성직자를 불러 죄의 문제를 해결받으려 하면서, 정작 삶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경우가 그것이다. 칸트는 이런 상황에서 성직자가 응해주는 것은 ‘마치 양심에 아편을 투여하는 것(to administer a sort of opium to the conscience)’과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의 삶과 죽음이 도덕적으로 가장 완전한 인간의 현시라고 하면서, 예수를 알아차리고 그를 자신의 삶에 맞이한 사람들은 신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했다(요 1:11-12). 구원은 순정한 윤리적 원칙들을 마음씨 안에 진실하게 채용하는 것 외에 없다는 것이 칸트의 단호한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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