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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가수 박진영이 주장하는 이상한(?) 삼위일체(6)

가수 박진영이 주장하는 이상한(?) 삼위일체(6)

박진영은 예수님이 성경에 분명히 ‘태어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태초 이전에 혼으로 성부 안에 계시다가, 태초의 시작점에 몸을 입고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후에 성부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 아들을 자신과 동일한 ‘하나님’의 격으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성경 구절을 있는 그대로 믿자는 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성자가 어떤 형태로든 창조 이전에 존재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영원부터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으로 온전한 신성을 지니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성자의 ‘나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첫째, 성자는 태초에 비로소 하나님이 되신 분이 아니라 태초에 이미 참 하나님이셨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한다. 같은 장에서 만물에 대해서는 “지은 바 되었으니”(3절)라고 말하고, 성육신에 대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14절)라고 말한다. 그러나 태초의 말씀에 대해서는 ‘되었다’가 아니라 ‘계셨다’라고 말한다. 태초가 시작될 때 말씀은 이미 계셨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 말씀이 어떤 분으로 계셨는가이다.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한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으로 이미 참 하나님이셨다. 이어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는 말씀은 성자를 피조물의 범주가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증언한다.

따라서 “태초 이전에도 혼으로 존재했다”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태초 이전의 성자가 이미 성부와 구별되는 영원한 참 하나님이셨다면, 이후 영을 받아 하나님의 격에 오르셨다는 설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때에는 아직 온전한 신성을 지니지 않으셨다면, 인정되는 것은 어떤 형태의 선재일 뿐 성경이 증언하는 영원하신 성자의 신성은 아니다. 쟁점은 성자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계셨는가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떤 분으로 계셨는가이다.

둘째, 잠언 8장은 성자가 혼으로 계시다가 몸을 받고 신적 지위에 오르는 과정을 기록하지 않는다. 잠언 8장에서 지혜는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22절), “내가 이미 났으며”(24절)라고 말한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이 지혜를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읽어왔다. 주목할 것은 22절의 “가지셨으며”는 존재의 시작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가지셨다'(히브리어 ‘카나’)는 본래 ‘얻다, 소유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부터 지혜를 자기 것으로 지니고 계셨다는 의미다. 이어지는 23-25절도 땅과 바다와 산이 생기기 전부터 지혜가 있었다고 거듭 말한다. 이 단락의 초점은 지혜가 언제 처음 생겨났느냐가 아니라, 어떤 피조물보다도 앞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데 있다. “내가 이미 났으며”(24절)라는 표현도 지혜를 사람처럼 등장시켜 말하게 하는 시의 언어로, 지혜가 창조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그린 것이다. 결코 존재가 시작된 출생일을 기록한 말이 아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로 고백하면서, 그 지혜가 어느 시점에 비로소 생겨났다고 말한다면, 그 전의 하나님께는 지혜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지혜 없는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반박하며 지적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무엇보다 이 본문에는 성자가 성부 안에 혼으로 들어 계셨다는 말도, 어느 시점에 별도의 몸을 받았다는 말도, 영을 받아 하나님의 격에 올랐다는 말도 없다. 지혜의 ‘나심’이라는 표현에서 그러한 단계들을 끌어내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해석이다. 잠언 8장을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으로 읽더라도, 거기에 기록되지 않은 성자의 기원 이야기를 덧붙일 수는 없다. 성경의 단어를 인용했다는 사실이 그 단어로 구성한 설명 전체를 성경적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셋째, 성자의 영원한 나심과 역사 속의 성육신, 메시아로 드러나심은 구별해야 한다. 교회가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다’고 고백하는 것은 어느 시점에 없던 존재가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두 분이 오래전부터 함께 계셨다는 뜻도 아니다. 성부는 영원히 아들의 아버지이시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 아들이시라는 고백이다. 여기에는 성자가 계시지 않았던 때도, 성자가 덜 하나님이셨던 단계도 없다. 성부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성자가 되었다는 뜻도 아니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이시되, 동일한 하나의 신적 본질을 지니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 성자의 영원한 나심과 삼위의 동일한 본질·능력·영원성을 함께 고백한다(2장 3항).

반면 성육신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라고 말한다. 영원하신 성자께서 마리아에게서 참된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37문도 그리스도께서 참된 몸과 이성적 영혼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역사적 시작이 있지만, 그 인성을 취하신 성자의 위격에는 시작이 없다. 몸을 받기 전에는 불완전한 성자였다가 몸을 받아 온전해지신 것이 아니다. 영원히 온전한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

또한 성경의 ‘낳았다’는 표현을 모두 성자의 존재가 시작된 사건으로 읽어서도 안 된다. 시편 2편 7절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는 왕을 세우시는 선언의 문맥에서 나온다. 사도행전 13장 33절은 이 말씀을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약속과 연결한다. 칼빈도 시편 2편 주석에서 이를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이 구절의 ‘오늘’은 성자가 처음 존재하게 된 출생일을 알려 주는 말이 아니다. 영원한 나심, 마리아에게서의 출생, 메시아적 지위가 드러나는 사건을 구별하지 않으면 서로 다른 말씀들을 하나의 ‘기원 이야기’로 뒤섞게 된다.

넷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성자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사건이 아니다. 박진영의 설명에서 가장 심각한 대목은 성부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 아들을 동일한 하나님의 격으로 세우셨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성자는 영을 받기 전에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1장은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아들을 동시에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창조주로 증언한다. 아들에 관하여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8절)라고 말한 뒤, 곧이어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을 그에게 부으셨다고 말한다(9절). 이어지는 10-12절은 그 아들을 하늘과 땅을 지으셨으며 변하지 않고 영존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같은 문맥 안에 아들의 완전한 신성과 기름 부으심이 함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성경은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신 때를 태초가 아니라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로 기록한다(마 3:16). 베드로도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행 10:38)라고 말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격을 수여한 사건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중보자께서 구원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일어난 역사 속의 사건이다.

따라서 본문의 논리는 ‘기름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니었다가 기름을 받고 하나님이 되었다’가 아니다. 이미 하나님이신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중보자로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바로 이 말씀을 해설하며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이 되시려고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 이전에도 하나님이셨다”(『아리우스파 반박』 1.46). 이 말은 성자의 신적 지위를 만들어 내는 사건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의 기름 부음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신 것을 그분의 인성과 중보 직무에 관련하여 설명한다(8장 3항). 성령을 받으셨기에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참 사람이 되시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이 구별은 교리의 말장난이 아니다. 참된 인성으로 드리신 그 순종과 고난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자신의 사역이기에,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효력을 갖는다.

요컨대 성자는 태초에 몸을 받고 이후에 하나님의 격으로 높아지신 분이 아니다. 태초에 이미 성부와 함께 계셨으며 친히 하나님이셨던 분이다. 그 영원하신 성자께서 때가 차매 참된 인간의 몸과 영혼을 취하셨고, 중보자로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성경은 성자가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영원히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는지를 증언한다.

성경의 단어를 붙드는 것은 좋다. 그러나 단어만 붙들고 그 단어가 놓인 문맥과 성경 전체의 증언을 놓치면, 성경을 믿는다면서 성경과 다른 그리스도를 만들게 된다. 다음 호에서는 아리우스도, 그를 반박한 니케아의 교부들도 모두 성경을 곡해했다는 그의 여섯 번째 주장을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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