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세상과교회를 잇는 나들목 칼럼] 거울 앞에서

거울 앞에서

일본의 오노다 히로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에 필리핀 루방 섬에 파견되었던 일본군 소위였습니다. 1945년에 일본의 천황이 패전을 선언함으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오노다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것을 모르고 정글에서 생존하며 끝까지 버텼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는 30년 동안 정글에서 머물며 투항하지 않았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오노다에게 전쟁이 끝났으니 정글에서 나오라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는 믿지를 않고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스즈키 노리오 교수가 1974년에 루방 섬을 방문해서 오노다에게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고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자료들을 보여주며 설득했습니다.

오노다는 자료를 통해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도 자존심을 내세우며 직속상관의 명령이 없이는 투항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일본은 오노다의 직속상관을 수소문해서 투항을 명령했고 결국 오노다는 30년간 생활했던 정글의 동굴에서 나왔습니다.

오노다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동굴에서 나온 순간을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가…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고 묘사했습니다. 전쟁이 끝났고,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30년이었습니다.

자기의 깨어짐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깨어짐의 시작은 자기 자신을 반추하는 거울로서의 대상을 만날 때 자기 개어짐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본모습을 반추하는 거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기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나 자신”이라는 “거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거울”은 스스로를 합리화해 주었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라는 위안을 줍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자기 자신”이라는 거울을 절대화하려 합니다. 자기 거울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도록 재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거울’은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 말씀이 기준으로 나를 볼 때 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의 모습이 생긴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할지도 알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보면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변질되었는지, 무엇이 무너졌는지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국어를 잘 하려면 주제 파악을 잘 해야 되고, 수학을 잘 하려면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 말씀을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했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괜찮은 줄 착각한 것입니다. 남들보다 의롭게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을 정기적으로 합니다. 구제를 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에 갇혀 남을 판단하게 됩니다. “저 사람 저렇게 살면 안되는데~” 했던 것이지요. 우리도 종종 이런 함정에 빠집니다. 설교를 듣다가 “오늘 설교, 그 사람이 들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목회자에게 인사합니다.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정작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지 못해서 잣대만 갖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목사의 착각은 성경을 더 많이 보고, 설교를 한다고 해서 자기가 설교의 그 사람이라는 착각입니다. 목회자는 말씀대로 살기 위해 치열해야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못해 가슴을 찢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이 목회자의 내면에 작동되지 않을 때 목회자의 파멸이 시작됩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도 “말씀의 부흥이 우리 교회에 일어나길 원합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눈물, 콧물, 회개의 기도가 성도들에게 일어나길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다가 문득 “회개 기도가 먼저 터져야 할 사람은 바로 너다” 라는 절절한 선언이 기도하던 중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밖에서 보기에는 놀이터처럼 여겨지지만 용광로여야 합니다.

교회는 교재가 있고, 사귐이 있어 놀이터 같지만 놀이터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녹여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만드는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불순물이 다 제거되고 순금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주의 날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을 교회에서 보내며 “일요일 하루”이지만 세상 삶과 단절이 일어납니다. 집안 걱정, 세상의 유혹,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잠시 세상과의 단절이 일어나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과 잠시 단절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이 되고, 말씀의 거울에서 투영된 나는 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나는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더 깨트려지고 악한 죄인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존재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지점에서의 회개는 감격이기도 하지만 삶의 치유가 일어나는 티핑포인트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일 예배가 그런 티핑포인트가 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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