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빚진 자의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용서는 사죄의 조건인가?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필수조건이 되는 것일까요? 누군가에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끔찍한 상처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억울함과 잔혹함의 시간을 겨우 버티어 냈지만, 한번씩 그때의 기억이 난데없는 부유물처럼 떠오를 때면 온 몸에 바늘이 꽂히는 듯한 끔찍한 아픔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래 연일 메스컴을 장식하는 잔인한 학원폭력의 피해자들 역시 그러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용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과 같이 느껴집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간구를 ‘끔찍한 기도’라고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라고 우리를 고문하시는 분일까요?
산상수훈: 법이 아닌 원리로서의 이해
주기도문은 산상수훈(마.5-7장)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엑기스가 주기도문에 담겨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법이라기 보다는 원리입니다. 법은 지키지 못하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원리는 따르지 않으면 손해를, 반대로 따르는만큼 수혜를 입게 됩니다. 수영의 원리를 익히고 나면 물을 즐길 수 있게 되듯, 산상수훈의 원리를 따라 사는 만큼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천국의 원리로서 이 기도를 이해하면 이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아야 함은 물론이고,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이 아닐까요?
자유를 위한 기도
예일대 신학과의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는 <배제와 포용>에서 “기억되는 상처는 경험되는 상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억되는 상처는 전부 현재진행형 상처입니다. 용서는 과거의 상처를 구속하므로 오늘의 나를 자유케합니다. 때론, 죽기보다 싫어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에 나에게 고통을 안겨 준 사람이 오늘의 나를 계속해서 고문하게 놓아두어선 안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정말 어려운 것이지만, 용서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려운 것입니다. 루이스 스머즈는 <용서의 기술>(*원제목: forgive and forget).에서 “To forgive is to set a prisoner free, and discover that the prisoner is you.(용서한다는 것은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 가르쳐주신 이 기도를 날마다 드리며 상처의 감옥에서 자신을 날마다 풀어주면 좋겠습니다. 상처에 미움이란 물을 계속 주면 그 상처는 흉기가 되지만, 용서란 물을 계속 주면 그 상처는 오히려 향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구주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가르쳐주신 이 기도를 통해 자유케 되며, 이 기도대로 살아가는 만큼 천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Fullerton 나들목비전교회 권도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