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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희년 이야기]호민관 그라쿠스 형제와 희년 정치인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와 희년 정치인

기원전 134년 여름, 호민관 선거에 로마의 명문 귀족인 한 청년이 출마하여 선출되었다. 그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였다. 고대 로마에서 호민관 제도는 원로원의 귀족 계급에 대항하여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되었는데, 제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승리한 직후인 이 당시에는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극심했다. 그 이유는 귀족들의 토지 독점과 자작농의 몰락 때문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토지는 권력과 부의 원천이다. 로마는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토지 일부를 몰수하여 국유지로 삼고 이 국유지를, 한 개인과 가족이 받을 수 있는 상한선을 정하여, 아주 적은 임대료를 받고 자국민에게 빌려주었는데, 이 국유지 임차권은 상속과 양도가 허용되어 사실상 사유지와 같았다. 귀족 계급은 법으로 규정된 상한선을 무시하고 이 국유지 임차권을 독점하고 노예를 이용하여 대토지를 경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 

그 반면에, 병역에 종사한 뒤 귀향한 평민의 절대다수인 농민들은 자신이 없는 동안 가족노동으로 얻은 수확물이 노예를 부리는 대규모 농장의 값싼 수확물에 밀려 팔리지 않거나 가격이 폭락하여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빚을 지게 되었고, 이 부채 때문에 땅을 빼앗기고 실업자로 몰락하여 수도 로마로 흘러들어 큰 사회 문제가 되었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만연해졌다. 그 결과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로마군도 급격히 전투력이 약화되어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반란군에 패배하게까지 되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그 원인이 불의한 토지 제도에 있음을 직시하고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여 토지 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그 골자는 이미 법으로 규정된 국유지 임차의 상한선을 회복하고 그 이상의 토지를 임차하고 있는 자는 그것을 국가에 반환하고 국가는 대신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농민에서 무산자로 전락한 이들에게 반환된 토지를 나눠 주어 자작농에 복귀시킴으로써 로마 시민 계층의 기반을 건전하게 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사회 불안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무산자들이 농촌에 다시 정착하는 데 필요한 보조금을 국가가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그러나 대지주인 원로원의 귀족들은, 겉으로는 개인에 대한 귀농 보조금을 국고에서 지출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속에 감춘 가장 큰 이유는 부정하게 임차한 토지의 반환에 따른 막대한 부와 기득권의 상실이었다. 귀족들의 지연 전술과 반대 공작으로 토지 개혁은 실행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호민관의 임기는 1년이었기 때문에, 토지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다음 해 호민관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그는 지지파와 반대파의 충돌로 혼란에 빠진 평민 집회에서, 귀족들의 공격을 받고 3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쇠몽둥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리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죽은 지 10년 후인 기원전 123년, 그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취임하여 로마 평민들을 위해 토지 개혁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개혁 입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두 해 후에 ‘반역자는 재판 없이 죽일 수 있다’는 초법적인 ‘원로원의 최종권고’에 의해, 가이우스 그라쿠스도 결국 그의 지지자 3,000명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라쿠스 형제가 죽었을 때, 형의 나이는 30세, 동생의 나이는 33세에 불과했으며, 그들의 시신은 모두 테베레 강에 던져져 무덤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근시안을 가진 어떤 사람들은 그라쿠스 형제의 비극적인 최후만을 보고 토지 개혁은 비현실적인 이상에 불과하다며 아예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몇 세대가 지난 후 그들의 개혁을 계승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그들의 염원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서 ‘그라쿠스 형제’로 알려진 그들의 이름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 개혁 운동에 순수의 정신과 불멸의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그라쿠스 형제가 사회 개혁을 위해 쓰러져간 그 시대에, 그들을 죽인 로마 귀족들도 결국에는 모두 죽었다. 그런데 그 로마 귀족들 가운데 그라쿠스 형제 외에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 보라, 그라쿠스 형제는 비록 죽임을 당했으나, 그들의 이름과 정신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이것이 바로 죽을지라도 다시 사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불의하고 참혹한 이 시대의 경제 현실 속에서 그라쿠스 형제를 생각한다. 세든 집이나 가게의 나날이 오르는 비싼 월세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서민들과 영세상인들,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저임금 비정규 노동을 몸과 영혼까지 부서질 정도로 열심히 하지만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청년들, 아버지의 실직으로 밥을 굶는 어린이들과 깨어지는 가정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빚을 지고 결국 고리대 사채의 덫에 빠져 고통당하는 사람들, 노숙하며 유리하는 빈민들을 바라보며 묻는다. 

정치인들 가운데 그라쿠스 형제와 같이 자기 생명을 바쳐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호민관(護民官)이 나올 수 없는가? 생산력이 증가하는 물질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나날이 더 심각해지는 ‘진보 속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헨리 조지가 통찰하고 제시한 대안과 같은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호민관은 나올 수 없는가? 

희년 토지법의 위대한 선언처럼,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땅에서 살아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레위기 25:23). 그리고 하나님은 나그네인 모든 인류에게 토지평등권을 나누어주셨다. 그래서 토지평등권은 천부인권이다. 이 성경의 진리를 확신하고, 지주 개인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가 만들고 올리는, 연간 300조원에 달하는 지대(地代, 토지 사용의 대가, 토지 임대료)를 해마다 거의 전부 환수하여 사회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게 하는 토지평등권 개혁을 피 흘림 없이 비폭력 명예혁명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희년 정치인’을 교회가 길러낼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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