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에서는 주기도문(마 6:9-13) 다음에 바로 용서에 대한 말씀(마 6:14-15)이 이어짐으로써 용서가 강조되고 있는 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주기도문(눅 11:1-4) 다음에 바로 여행 중에 찾아온 굶주린 벗에게 먹일 것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눅 11:5-8)가 이어짐으로써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가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나’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벗’에게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여행 중에 찾아온 벗은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 또한 그 벗을 맞은 사람 역시 그에게 먹일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이 굶주리는 가난한 벗을 위해 안타까워하며 그에게 먹일 것을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가 바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인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고 세 번 반복되는 말씀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말씀하시며,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후, 마지막에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눅 11:9-13). 왜 마지막에 하나님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성령 하나님이 가난한 우리가 굶주리는 가난한 벗들을 위해 안타까워하며 그들에게 먹일 것을 달라고 간청할 때 그 기아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는 누가복음 4장의 ‘나사렛 메시아 선언’에서 성령 하나님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주의 은혜의 해(안식년, 희년)를 선포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본문이다. 여기서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포괄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령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임하셔서 교회가 가난한 자에게 안식년과 희년을 선포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성령 하나님이 강림하신 예루살렘 초대교회 가운데 밭들과 집들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을 통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으로써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는 말씀에서 실현되었다. 곧 성령 하나님이 임하신 초대 교회는 그 가운데 가난한 자가 없게 되는 안식년 공동체, 희년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다(신 15:1-4).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의 가난한 성도들부터 시작하여 한국 사회 안의 가난한 사람들과 북한의 가난한 동포들, 그리고 사하라 이남의 극빈국가들처럼 기아와 빈곤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온 세계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기아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기아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실 것이다. 교회에서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처럼 ‘자원(自願)적 희년’의 실천을 통해 희년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에서는 토지평등권 개혁처럼 ‘제도(制度)적 희년’의 실현을 통해 그렇게 해 주실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간구하며 진력하는 사람들을 통해 희년 교회, 희년 세상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