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의 믿음과 복음의 확장성
제자들의 두 번째 짧은 배 여행(막 6:45-8:10)에서 제자들은 풍랑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벳새다가 아니라 게네사렛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 지역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막 6:53-56), 바리새인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과의 정결법 논쟁을 통하여 형식이 아니라 본질의 중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막 7:1-23). 특별히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은 깨끗함과 더러움(clean and unclean)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끗함과 더러움을 나누는 기준은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12가지 죄악입니다(막 7:21-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사적인 공간인 그 집을(막 7:17) 떠나 두로(Tyre) 지역으로 향하셨습니다(막 7:24). 두로 지역은 한때 중요한 무역 도시였습니다. 두로는 갈릴리 북부와 인접한 지역으로, 오랜 시간 동안 팔레스타인(Palestine)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특별히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통치 시기에 두로는 팔레스타인과 강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두로의 화폐(coinage)는 갈릴리 지역에서도 널리 통용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로 지역은 명백한 이방인 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Against Apion』1.70에 의하면 애굽과 더불어 페니키아인들 중에서 두로 사람들을 ‘악명 높은 우리의 가장 격렬한 적들’(notoriously our bitterest enemies)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로에 도착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셨고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려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막 7:24) 그리고 그(예수)가 그곳에서 일어나 두로 지역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예수)가 집으로 들어가신 후에 그(예수)는 아무도 알기는 원하지 않으셨지만, 그(예수)는 숨을 수 없었습니다. (25) 오히려 즉시 자신의 딸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한 여인이 그(예수)에 관해 듣고 와서 그(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26) 그러나 그 여인은 헬라인이었고, 시리아-페니키아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딸로부터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그(예수)에게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27) 그리고 그(예수)가 그녀에게 말하였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부르게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취하여 작은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대답하여서 그(예수)에게 말했습니다. “주님, 식탁 아래의 작은 개들조차도 아이들의 [빵]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29) 그리고 그(예수)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 때문에 가라, 너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 (30) 그리고 그 여인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그 아이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귀신은 나가 있었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마가는 예수님께서 두로에 가신 목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는 두로 지역에 있는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숨기를 원하고 계시다고 기록합니다(막 7:24b).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과 달리(마 15:21-28)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두로 지역에서의 공식적인 사역을 원하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또한 마가는 두로와 시돈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하면서 제자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막 7:24-37), 예수님께서 빵 일곱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명을 먹이시는 사건(막 8:1-10)에서 제자들을 등장시켜서 예수님의 이방인 사역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하여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읽는 이방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마 10:5-6)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두로 지역에서 예수님에 관해 듣고 집에 직접 찾아온 여인의 딸은 더러운 영(unclean spirit)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더러운’(akathartos: unclean)이라는 개념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정결법 논쟁에서 ‘부정한’(koinos: defiled)이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부정한 존재인데(행 10:28), 심지어 이 여인의 딸은 부정한 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의 대적자들과의 논쟁에서 레위기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음식법과 관련해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 주신 것처럼, 마가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이방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을 통하여 복음의 확장성을 강조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하는 여인의 모습과 반대로 역접을 나타내는 전치사 ‘de’(but)를 사용해서 이 여인의 신분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마가는 이 여인은 헬라인이었고, 시리아-페니키아(Syrophoenician) 출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가가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God-fearer)이었거나 또는 개종 중에 있었던 사람(half-convert) 이었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마가와 다르게 마태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이 여인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다윗의 아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딸이 악한 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마 15:22)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청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나는 이스라엘의 집에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마 15:24b)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긴장감 속에서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사역이 어디에 집중되어져 있는지 명확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예수)가 그녀에게 말하였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부르게 먹야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취하여 작은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 (막 7:27)
이러한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정결법과 관련해서 무리들을 가르치신 “사람 밖으로부터 그에게 들어가서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막 7:15)의 말씀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결법의 원칙은 외부적 요인 곧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 요인 곧 믿음과 성품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해석해 보겠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딸을 가지고 있었던 이 여인은 종교적, 사회적 관념으로 사로 잡혀 있는 장벽을 뛰어 넘어서 사회적 교류가 금지되어 있는 이방인 여인이 유대인 남자 예수님이 거하시는 집에 찾아와 간청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자신의 사역이 잃어버린 유대인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예수님의 사역이 오직 유대인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속 사역의 시간적 순서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행 13:46; 롬 1:16).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인 사역을 배제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proton: first)라는 단어의 의미를 통하여 예수님의 사역의 시간적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자녀들’은 ‘잃어버린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작은 개’는 여인의 딸을 의미합니다. 또한, ‘빵’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기적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개’라는 헬라어 명사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큐온, 큐노스’(kuon, kunos)라는 단어가 아니라 ‘큐나리오이스’(kynariois)라는 ‘작은 개’를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용하는 ‘작은 개’의 의미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2절에서 복음으로부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행악자들을 향하여 “개들을(kunas) 조심하라”라고 말한 의미에서의 ‘개’가 아니라, 작은 강아지들로 집에서 키우는 집안 동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을 향한 강한 혐오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여인은 재치 있는 말재주(repartee)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대답하여서 그(예수)에게 말했습니다. “주님, 식탁 아래의 작은 개들조차도 아이들의 [빵]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막 7:28)
이 여인의 대답은 예수님의 능력을 향한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강한 긍정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의 능력이 더러운 귀신에 사로 잡혀 있는 자신의 딸에게 임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속 사역의 시간적 순서를 인정하면서도 작은 개들 또한 먹을 몫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빵의 부스러기만으로도 자신의 딸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고백하는 믿음의 고백으로 인하여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딸이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막 7:29). 이 여인도 믿음으로 자신의 집에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고침을 받은 자신의 딸이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막 7:30).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또한 마가는 자신의 이방인 공동체에게 전하려고 하는 복음의 확장성과 보편성을 더욱 선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함께 나누기>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두로가 이방인 땅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마태복음 15:21-28절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 달리 마가복음 7:24-30절에서는 제자들이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단지 이 사건의 밖에서 바라보는 주변인으로 처리하면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딸의 어머니를 부각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 사로 잡혀 있는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정결법 논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어떻게 이 내용을 연결하고 있습니까?
- 마태복음과 달리 마가는 자신의 딸이 더러운 영에 사로 잡혀 있는 여인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5:21-28절의 말씀을 읽고 그 차이점을 찾아보십시오.
-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마가복음 7:27절의 내용을 해석해 보십시오.
- 예수님의 사역은 잃어버린 유대인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구속 사역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습니까?
-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작은 개’라는 헬라어 명사는 무엇이고, 본문에서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개’라는 헬라어 명사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큐온, 큐노스’와 ‘큐나리오이스’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습니까?
-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 사로 잡혀 있는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 복음의 확장성은 우리의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있습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