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역설적 대조를 통한 참된 섬김, 누가 가장 큰 자인가?

역설적 대조를 통한 참된 섬김, 누가 가장 큰 자인가?

마가복음 8:22-10:52에 기록되어 있는 길 위에서의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Passion Prediction: 막 9:30-32)는 예수님께서 ‘말 못하는 영’에 사로잡혀 있는 소년을 고쳐 주시고, 집에서 기도와 관련된 참된 제자도를 가르치신 이후에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적인 가르침의 공간인 집에서 나와 갈릴리를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었을 때 길 위에서 두 번째 수난 예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반복적인 제자들의 오해(misunderstanding)로 이어집니다.

(막 9:30) 그리고 그들이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었고, 그(예수)는 아무도 알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31) 왜냐하면 그(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사람들에 의해 넘겨지고, 그들이 그(인자)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한 지 삼일 후에 살아날 것이다.” (32)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알지 못했고, 그(예수)에게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여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막 8:31)와 비교해서 두 번째 수난 예고(막 9:31)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된 베드로의 신앙 고백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 8:29d) 위에 기록되었다면,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는 ‘말 못하는 영’에 사로잡혀 있는 소년을 고쳐 주시시고, 사적인 공간인 집에서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가르쳐 주신 이후에 갈릴리를 지나가는 여정 중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는 간접 화법(indirect discourse) 형식이었다면,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는 직접 화법(direct discourse)을 통해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는 마가의 표현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수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막 8:31)라고 기록하면서 예수님 새로운 가르침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시는(edidasken: he was teaching) 행동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미 결정되었고 시작되었다는 직접적인 사실을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전달되고 있습니다.

셋째,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버린 바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면, 두 번째 수난 예고는 “인자는 사람들에 의해 넘겨지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는 구체적 인물이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일반화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 28절의 말씀을 주석할 때 우리가 이미 생각해 본 바와 같이, 다니엘서 7:13절의 ‘인자와 같은 이’는 모든 사람들 위에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영원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상속 받았습니다(단 7:14).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인자’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대행하는 인물로 ‘죄 사함의 권세’(막 2:10)를 가지고 계시고, 안식일의 주인이시며(막 8:28),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막 13:26),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막 14:62)를 공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 진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통치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예수님께서 넘겨질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 ‘넘겨진다’(paradidonai: is going to be delivered)라는 표현을 현재 시제(present tense)로 사용해서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이미 결정되었고 시작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관해 제자들의 오해도 지속되어집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서 베드로가 제자들의 대표자로 예수님을 책망하면서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면,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수난 예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막 9:32).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난 예고에 질문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관련해서 마음이 굳어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의도적 회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두 번 말씀하신 수난 예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떠한 길을 걸어가시려고 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와 반대로 제자들은 길 위에서 누가 가장 큰 자인지에 관한 논쟁을 길 위에서 하고 있었습니다(막 9:34). 이러한 논쟁에 관하여 R.T. France는 예수님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지도자가 될 것인지 논쟁을 했을 것이라고 흥미로운 제안을 합니다(R.T. France, The Gospel of Mark, Eerdmans, 2002, p. 373).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의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죽음 이후를 생각했다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실질적으로 유대인의 왕이 되셨을 때 누가 더 큰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지 논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막 9:33) 그리고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예수)가 집 안에 계실 때 그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너희들은 길 위에서 무엇을 의논했느냐?” (34)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길 위에서 누가 더 큰 자인지 서로가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35) 그러자 그(예수)가 앉으시고 열 둘을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첫째가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낮은 자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6) 그리고 [예수께서] 어린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오셔서 그를 가운데 세우시고, 그를 팔로 안으신 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면, 그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가버나움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여러 번 생각해 보고 있듯이 ‘집’(oikos: house)이라는 특별한 사적인 공간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인 권력에 초점을 두고 있는 제자들에게 참된 제자도와 관련하여 가르치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그리스-로마 시대 뿐만 아니라 유대 사회는 고대 위계 질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 사회에서 첫 번째 그룹에 속한 자들은 종교와 정치, 그리고 학문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자들로서 로마 황제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은 유대 총독과, 종교 지도자들로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사회적으로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가장 낮은 부류에 해당하는 자들이 여성들과 종, 그리고 노동력이 없는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고 세속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관한 역설적인 대조를 통하여 가치의 역전(reversal of values)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가치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당시 유대 사회가 가장 비천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마지막이 되는 자들로 그들은 섬기는 사람(diakonos: servant)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섬기는 자, 또는 종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디아코노스’(diakonos)는 섬기는 자, 또는 하인으로 사회적 상급자를 자발적으로 섬기는 자유인 또는 종을 의미합니다. 이와 반대로 ‘둘로스’(doulos)는 법적인 상태에서의 노예(slave)의 개념으로 주인을 섬기는 것이 비자발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기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낮은 자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45절에서 자신이 이 땅에 섬기기 위해서(diakonesai: to serve)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 섬김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대속물(lytron: price of release, ransom)로 주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어린 아이(paidion: very young child or infant) 한 명을 데리고 오셔서 그를 가운데 세워 안으신 후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계적인 병행 구조(step parallelism)를 통해 한 사람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이처럼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고 섬길 때 그는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동시에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강조하셨습니다(Robert H. Stein, Mark, Baker Academic, 2008, p. 444).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아랍인들이 사용하는 셈족어(Semitic)에서 사용되는 “변증법적 부정”(dialectical negation) 용법을 통해 어린 아이 한 명을 영접하는 행동은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 이상의 더 높은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Joel Marcus, Mark 8-16, The Anchor Yale Bible 27a, p. 676).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통해 예수님의 필연적인 수난과 부활의 사건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이미 결정되었고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이해하지 못하였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바라보면서 서로 가장 높은 자가 되기 위해서 논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아시고 집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관한 역설적인 대조를 통하여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기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함께 나누기>

  1.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막 8:31)와 비교해서 두 번째 수난 예고(막 9:31)는 어떠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가 간접 화법으로 기록되었다면, 두 번째 수난 예고가 간접 화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1. 첫 번째 수난 예고와 두 번째 수난 예고를 비교해 보면,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넘겨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넘겨진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 제자들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관해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제자들이 길 위에서 누가 더 큰 자인지 논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떠한 이미지로 메시아상을 그리고 있었습니까?
  1.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첫째가 되는 그룹과 마지막이 되는 그룹은 누구입니까?
  1. 예수님 당시에 두 가지 종의 의미를 나누어서 설명해 보십시오. ‘디아코노스’와 ‘둘로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섬기는 모습은 ‘디아코노스’입니까? or ‘둘로스’입니까?
  1.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섬김에 관하여 설명하셨을 때 사용한 “변증법적 부정”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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