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난 앞에서 준비된 자입니까?
참된 제자도와 관련된 제자들의 지속적인 오해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길 위에서 세 번째 수난 예고(Passion prediction)를 말씀하십니다(막 10:32-3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 나타나는 반복적인 제자들의 잘못된 오해(막 10:35-41)는 참된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막 10:42-45)으로 이어집니다.
(막 10:32)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었고, 예수께서 그들보다 앞서 가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고 있었고, 뒤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예수)가 다시 열둘을 데리고 가셔서 자신에게 다가올 일들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3)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34) 그리고 그들(이방인)이 그를 조롱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그(인자)에게 침 뱉을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그를 채찍질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그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삼일 후에 그가 일어날 것이다.” (Translated by YG Kim)
마가는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를 기록하기 전에 ‘예루살렘’이라는 지리적 명칭을 언급해서 벳세다에서 시작된 순례의 여정의 최종 목적지를 언급합니다(막 10:32a). 마가는 예수님께서 이전의 모습과 달리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제자들보다 앞서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이러한 모습이 제자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행동이었다고 언급합니다(막 10:32b-d).
마가는 열 두 제자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놀라고 두려워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결단력이 제자들에게 놀라움의 이유가 되었고,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예수님과 자신들의 대적자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위협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박해’(persecution)가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이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두 번의 수난 예고와 달리,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수난 예고를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의 주체가 되는 ‘인자’(the Son of Man)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인자는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막 2:10)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세 번의 수난 예고를 통해서 ‘인자’의 역할을 점진적으로 강화하셨는데,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인자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아 이방인들로 표현되어진 로마의 권력자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막 10: 33).
인자가 로마의 권력자들에게 넘겨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로서 자신이 고난 받는 모습을 세 가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그 모습은 인자가 이방인들에 의해 조롱 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죽을 것이라는 수난 예고입니다(막 10:34a-d). 이러한 모습은 마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조롱과 침 뱉음, 그리고 채찍의 사건과 일치합니다(막 15:15-20a).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는 이전의 두번의 수난 예고와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죽음 이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로 결론을 맺습니다(막 10:34e). 예수님께서는 세 번의 수난 예고를 통하여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건이 하나님의 뜻(Divine will)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참된 제자도의 핵심인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이후에 무반응으로 일관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 이후에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변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막 8:32-33). 그러나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에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고(막 9:32),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더 깊이 알려고 하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무반응과 별개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중심이 되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의 실상(實相)을 깨닫지 못하자 허상(虛像)을 좇아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을 통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수난의 길을 다시 한번 설명하십니다.
(막 10: 35)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그(예수)에게 가까이 와서 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당신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행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36) 그러자 그(예수)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37) 그러자 그들이 그(예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영광 안에서 한 사람은 당신의 오른쪽에, 그리고 한 사람은 왼쪽에 앉도록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38)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무엇을 구하는지 알고 있지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들이 마실 수 있느냐? 또는 내가 받는 그 세례로 너희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그러자 그들이 그(예수)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들이 마실 것이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들이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나의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준비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Translated by YG Kim)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에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막 2:16-20).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우레의 아들들’이라고 부르기도 하셨고(막 3:17), 그들을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리시는 순간에도(막 5:37),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화되는 모습 가운데에서도 함께 하였습니다(막 9:2).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예수님께서 친애하는 제자들이라고 하는 전제 아래에서 자신들의 요청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직접적으로 예수님께 자신들의 간청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헤롯이 자신의 의붓 딸에게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에게 구하라. 내가 너에게 줄 것이다”(막 6:22)라는 풍자적 유사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허황된 꿈을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 이유는 야고보와 요한이 고난 받는 메시아의 모습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들의 특권 의식을 가지고 권력과 지위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은 “우리가 당신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행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막 10:35b)라는 표현을 통하여 권력에 집착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막 10:36b)라고 질문하셨고, 그들은 “당신의 영광 안에서 한 사람은 당신의 오른쪽에, 그리고 한 사람은 왼쪽에 앉도록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막 10:37b)라고 답변합니다.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 예고(막 8:31) 이후에 참된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에서 사용하신 “인자도 자신의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에서”(막 8:38)라는 표현을 염두해 두고 말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재림과 관련해서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예수님께서 왕위로 오르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한 사람은 최고의 권력 다음을 상징하는 오른쪽에(왕상 2:19), 다른 한 사람은 오른쪽보다 상대적으로 낮지만 서열 3위에 해당이 되는 왼쪽에(Josepus, Jewish Antiquities 6.11.9 § 235)앉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은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자신들의 권력 욕구에 가득 찬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무엇을 구하는지 알고 있지 못한다”(막 10:38b)라는 표현을 통하여 야고보와 요한의 잘못된 권력 욕구에 반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잘못된 요구에 대한 대가로, 그들이 자신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지를 두가지 비유(metaphor)로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의 반문은 ‘잔’(poterion: cup)과 ‘세례’(baptisma: baptism)와 연결되어 있는데, ‘잔’과 ‘세례’는 제자들에게 다가올 고난과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잔’(cup)은 운명, 곧 ‘몫’(portion)을 상징하며, 긍정적 의미로 축복의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하지만(시 23:5; 116:13), 때로는 하나님의 진노(wrath)와 심판(judgment), 그리고 고통(suffering)을 상징합니다(시 75:8; 렘 25:15, 17, 28). 유대 묵시문학에서도 잔의 이미지로 사용하는 은유는 때때로 한 개인의 자연사(自然死)를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단순히 나이가 들어 맞이하는 죽음이 아니라 시기가 이른 고통스러운 죽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Douglas R. A. Hare, Mark,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6, 129).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의미에서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시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들이 마실 수 있느냐?”(막 10:38c)라는 질문은 단순히 죄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후에 그들에게 닥칠 박해(persecution)와 순교(martyrdom)를 포함한 고난을 함께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성경에서 세례를 다시 태어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순교의 세례’(the baptism of martyrdom)의 의미에서 접근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례의 의미는 불행과 슬픔 등으로 압도되거나, 잠겨 버리는 것을 비유적인 표현입니다(BDAG. baptizo, 3.c; 막 10:38, 마 20:22; 눅 12:50; 롬 6:3).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 역(LXX) 성경에서 “악이 나를 잠기게 한다”(사 21:4)는 표현은 ‘벱티조’라는 헬라어 동사의 다른 예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중심적이고 세속적인 영광을 추구하고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에게 참된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고난의 길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막 10:39b)라는 대답으로 맹목적인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잔’과 ‘세례’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대답을 인정하시며, 그들이 실제로 고난에 참여할 것을 예언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막 10:39d).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질문에 관한 예수님의 권한의 제한과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강조하여서 최종적인 답변을 하십니다(막 10:40).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한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겸손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종속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수 있는지 대답하고 계신데, 바로 고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준비된 자들입니다.
<함께 나누기>
- 마가가 10:32절에서 ‘예루살렘’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앞서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습니까?
- 예수님의 처음과 두 번째 수난 예고와 달리, 세 번째 수난 예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의미를 묻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실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허상을 좇아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추구하고 있는 허상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의 의미를 설명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들이 마실 수 있느냐?”는 질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 마가복음 10장 40절에 기록되어 있는 준비된 자는 누구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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