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자신의 목숨을 속량물로 주시는 예수님

자신의 목숨을 속량물로 주시는 예수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높은 자리를 요청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 열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몹시 화가 났습니다. 마가는 열명의 제자들이 왜 화를 내기 시작했는지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한 상황 가운데에서 최고의 지위와 특권을 얻고자 하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누가 가장 큰 자인가에 관해 논쟁하고 있었을 때(막 9:33-34)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막 9:35-37). 그러나 참된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요청한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번 예수님께 참된 섬김에 관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막 10:41) 그리고 열명이 듣고 난 후에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42)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알지 못하느냐? 열방들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며, 그들의 큰 자들은 그들을 권세로 통치한다. (43) 그러나 너희들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누구든지 너희들 가운데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들의 종이 될 것이다. (44) 그리고 누구든지 너희들 안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왜냐하면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왔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속량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는 권력에 관한 세상의 원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섬김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열방(ethnos: nation)들로 표현되어 있는 권력자들은 당시 로마인들과 헤롯 가문과 같은 이스라엘 외의 외부 권력자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를 향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로마 권력자들의 통치 방법은 권세(exousia: authority)였습니다.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사용해서 백성들을 착취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 또는 권력을 폭군처럼 백성들에게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너희들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막 10:43a)라는 말씀을 통해 혁명적인 윤리를 제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배와 억압으로 상징되어지는 권력에 의한 통치 개념을 전복(顚覆)시키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개념은 첫째,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그들 가운데에서 종(diakonos: servant)이 되는 모습이고(막 10:43), 둘째,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들도 모든 사람의 종(doulos: slave)이 되는 모습입니다(막 10:44).

예수님께서10:43절에서 말씀하시는 종(diakonos: servant)은 권력자들의 식사 중에 시중을 들거나, 다른 사람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예수님 당시에 일상적인 용어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의 종(diakonos)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행해지는 개인적인 봉사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고 있는 주인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10:44절에서 말씀하시는 종(doulos: slave)은 고대 그리스도 로마 시대에 가장 낮은 신분에 해당되는 자들입니다. ‘둘로스’로서 종들은 사회적, 법적 의무 때문에 타인을 섬기는 노예들로, 그들의 노동은 자발적이라고 보다 비자발적 종속에 의한 노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생각해 보면,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봉사 행위에 집중되어져 있는 ‘디아코노스’의 모습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자가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신분에 속한 ‘둘로스’로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사회의 가치관을 뒤집는 대변혁(transvaluation of values)의 말씀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큰 자가 되고 첫째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억압과 지배를 통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섬김과 자기 낮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리더십을 통해 당시 제자들의 눈에 비치는 세상 가치관의 거울을 깨뜨리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라보는 거울 속에는 야망과 권력을 좇는 세상의 지도자들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야망의 거울을 깨뜨리고 섬김을 통하여 예수님의 잔과 세례에 함께 동참하는 섬김을 통한 십자가의 길을 원하셨습니다(막 10:38).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리더십을 수난 예고와 연결해서 제자들에게 ‘인자’ (ho huios tou anthropou: the Son of Man)의 역할로 설명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인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가장 자주 사용하신 호징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인자’는 세 가지 역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 인자는 지상에서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역할입니다(막 2:10, 28).

둘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의 수난 예고에서 인자는 반드시 고난을 받아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역할입니다 (막 8:31; 9:31; 10:33).

셋째, 인자는 영광 가운데에서 재림하셔서 미래의 심판자의 역할입니다(막 8:38; 13:26; 14:62).

이러한 세 가지 ‘인자’의 역할 가운데에서 마가복음 10:45절의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하는 역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사명을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다시 한번 재정의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다니엘서 7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7:13-14절의 말씀을 근거해서 생각해 보면, 인자에게는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들을 말하는 자들이 인자를 경배하며, 인자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있고, 인자의 왕국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자의 모습을 역전(reversal) 시켜서 인자는 스스로 종의 길을 택하여 섬기는 자이고,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목숨(soul)을 내어 놓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인자의 모습이 섬김의 리더십의 표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면서, 그 섬김의 리더십의 구체적인 역할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대속적인 죽음을 구원론적 목적(soteriological purpose)을 가지고 설명하시는데 바로 인자가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속량물로 주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대속물’(lytron: price of release, ransom)이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가복음 10장 45절과 이와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20:28절에 두 번 사용이 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LXX)에서는 더 많은 사용 용례가 있습니다.

Adela Yarbro Collins 교수는 자신의 책 The Beginning of the Gospel: Probings of Mark in Context에서 칠십인역(LXX) 구약 성경을 기초해서 ‘대속물’이라고 번역된 ‘뤼트론’(lytron)의 사용 용례를 제시합니다.

첫째, ‘뤼트론’(lytron)은 인간 사이에서 다양한 거래를 위해서 지불되는 비용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노예의 자유를 위한 보상금(레 25:51-52), 전쟁의 포로를 되찾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사 45:13), 손해에 대한 보상금(출 21:28–32; 민 35:31–32; 잠 6:35), 그리고 조상 대대로 이어진 땅을 되사오는 비용(레 25:24–28)을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

둘째, ‘뤼트론’(lytron)은 인간이 하나님께 행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문맥에서도 사용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되사오는 값이나(레 27:30-33; 민 3:11-13; cf. 출 13:1-2),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대속하는 행위(출 30:15)입니다.

그러나 ‘뤼트론’(lytron)이라는 단어가 동사형 ‘뤼트로’(lytroo: to ransom)로 사용이 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는 구속 행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는 모습을 표현할 때 ‘속량하다’(출 6:6)라는 단어가 사용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시키시는 능력이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시고, 사망에서 구속하여 건져내시는 능력으로 비유됩니다(호 13:14). 시편 130편(LXX 129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행위가 구속(redemption) 또는 속량(ransom)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시 130:7-8). 또한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구속받은 자들’(the redeemed)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량하여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에 시온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사 35:9-10; 41:14; 43:1, 14). (See, Adela Yarbro Collins, The Beginning of the Gospel: Probings of Mark in Context, Fortress Press, 1992, 68-69)

이러한 배경에서 마가복음 10:45절의 ‘대속물’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을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된 ‘몸값’(ransom)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인자가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형벌을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자신의 목숨을 ‘속량물’로 준다는 의미는 이사야서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53:10절과 12절을 근거해 보면, 여호와의 종은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건제물로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soul)을 내어 주신다는 선언은 고난 받는 종이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하는 행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사 52:12).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받는 종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그가 많은 자들의 죄를 지고, 범죄자를 위해 중보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사 52:12). 따라서 고난 받는 종과 인자는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받는 종이 징계를 받는 목적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샬롬’(salom: peace)입니다(사 53:5).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고난 받는 종에게 담당시켜서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 사이의 ‘샬롬’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난 받는 종으로서 인자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속량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함께 나누기>

  1.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요청한 내용을 들은 열명의 제자들이 화가 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 당시 로마 권력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개념으로서 섬김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1. 종의 개념 가운데에서 ‘디아코노스’와 ‘둘로스’의 차이점을 구분해서 설명해 보십시오.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의 리더십은 제자들의 잘못된 세상적 가치관의 거울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세상적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의 리더십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1.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인자’에 관하여 설명해 보십시오.
  1. 다니엘서 7:13-14절에 기록되어 있는 ‘인자’와 마가복음 10:45절에 기록되어 있는 인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습니까?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속물’의 의미를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설명해 보십시오.
  1. 이사야서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통해 마가복음 10:45절에 기록되어 있는 ‘인자’의 모습을 설명해 보십시오.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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