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6 교육의 핵심, ”쩨다카“와 ”미슈파트“
D6는 부르심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작점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 대해 아브라함만큼 오해되는 인물도 역시 드물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하면 창세기 12장 1,2절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따로 있다. 창세기 18장 19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바, 큰 민족이 되리라는 것과 땅을 주신다는 약속은 하나님이 주신 땅위에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 자손으로 더불어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을 위한 배경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을 살 때,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해 복을 받게 된다(창 18:18). 결국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은 사실상 자손과 땅, 복이라기보다는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의’(쩨다카)와 ‘공도’(미슈파트)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제자도이다. 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각각 ‘츠다카’와 ‘미슈파트’이다. 아브라함에게 명령된 의와 공도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원하시는 삶의 핵심에는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놓여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해 앉은 보좌의 두 기초는 바로 쩨다카와 미슈파트이다(시 97:2).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그 백성의 삶은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교육하는 삶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요구 하시는 바 올바른 믿음의 행위를 보였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라함이 이웃에게 대해 ‘쩨다카’를 행한다는 것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자녀와 자손이 성경의 가난한 자를 대표하는 고아, 과부, 이방인의 보호자로 양육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한 긍휼에 기반한 쩨다카와 미슈파트의 실행은 단순히 구제(쩨다카)사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가난한 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그들을 억압과 압박 속에서 건져내는 것,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미슈파트)이다. 그런 점에서 쩨다카와 미슈파트의 실행은 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연관되어있다.
D6 교육의 핵심은 “쩨다카”와 “미슈파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듯이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자녀와 자손에게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행하고, 순종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의 기본적인 임무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쩨다카와 미슈파트를 실행하는 것이었다(시 72:1~3).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공(미슈파트)과 의(쩨다카)로 다스렸다(삼하 8:15).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후손에 대한 기대는 다름 아닌 쩨다카와 미슈파트에 의한 통치에 대한 기대이다. 그러므로 미슈파트와 츠다카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다윗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의미하다(렘 22:30). 그래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착각을 고발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쩨다카와 미슈파트’이지만, 이스라엘은 예배와 제사를 응답의 열매로 여겼고, 예언자들에게 그러한 제사는 헛것이었으며 백성을 미혹하는 우상숭배와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예레미야는 우상숭배가 무익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렘 2:11),
오늘날의 교회 교육에서 그리스도인이 부름받았다는 것은 그와 그의 후손 주위에서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행해져서 억울한 사람이 없고 억울한 눈물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사방에 가득한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아마 진정한 제자도(쩨다카와 미슈파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자선과 구제의 부족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가난 때문에 전세값을 감당할 수 없어 수도 없이 변두리로 변두리로 이사해야 하고 그 자녀들은 먼 곳에서 통학하든지 전학해야 하며, 가난 때문에 사교육을 시킬 수 없어, 좋은 대학에 못 가서 가난이 대물림되고 가난한 이웃들의 고달픈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하고 눈물나게 하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은 쩨다카와 미슈파트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점에서 쩨다카와 미슈파트의 삶을 살도록 자손대대로 교육하는 것이 중용하다.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 백성의 사회윤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백성을 부르신 목적이다:
“오직 공법(쩨다카)을 물 같이 정의(미슈파트)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암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