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10), 겸손과 용기
“당신의 일상 생활이 당신의 교리와 모순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당신이 눈먼 자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걸림돌을 그들 앞에 놓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당신의 혀로 하는 말을 삶으로 뒤집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스스로 모순되고,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혀를 거짓으로 만들고, 입으로 한두 시간 동안만 설교하다가 일주일 내내 손으로는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훨씬 더 큰 방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허튼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설교가 지껄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진심으로 말하는 자는 분명 자신이 말하는 대로 행할 것입니다.
설교와 삶 사이에 이러한 불균형을 초래하는 사역자들의 전형적인 오류는, 바르게 설교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도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아주 조금도 혹은 전혀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설교에서 단어 하나라도 잘못 놓거나 눈에 띄는 결점을 드러내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하지만 삶에서 애정, 말, 그리고 행동을 잘못 놓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잘하기 위해 연구하는 만큼, 잘 살기 위해서도 연구해야합니다.”
위의 인용 글은 17세기 청교도였던 리차드 백스터가 설교자의 모순된 삶이 설교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묘사한 내용입니다. 물론 청중들은 설교자의 탁월한 전달 기술이나 아름다운 목소리 그리고 몸의 제스처와 같은 외적인 요소에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설교자의 일상 생활은 청중들에게 더 강력한 힘을 발산합니다. 사람들은 설교자의 인격과 삶을 신뢰할 때,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설교자의 언어, 주장, 호소를 단순히 실체가 없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근원을 감지하고 평가합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설교하는 사람의 사랑, 겸손, 확신, 기쁨, 그리고 힘이 그의 말과 그의 삶 사이에 일치하는지를 찾습니다. 청중은 말 뒤에 어떤 종류의 에너지가 있는지, 또는 그 에너지가 부족한지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자 내면의 확신의 부재나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욕망이나 독선적인 태도까지 알아차립니다. 결국 설교의 내용과 삶의 불일치는 청중들의 마음과 생각을 닫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이 원리를 명확히 꿰고 있던 “설교의 황제” 스펄전은 설교자는 도덕적인 면에서 더더욱 진보하도록 힘쓸 것을 강조합니다. 설교 사역에서 최고의 수준을 얻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자격 요건과 언변의 자격 요건도 있어야 겠지만 높은 도덕적 자질이 요구된다고 말합니다. “마치 바울이 손에서 독사를 떨어 버린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악한 것들을 떨처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덕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갖추어야 합니다. 용기라는 위대한 도덕적인 특질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무례함이나, 건방짐, 혹은 자만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올바른 것을 행하고 말할 수 있고, 또한 모든 곤경 중에서 아무도 잘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똑바로 전진하는 진정한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실생활에서의 겸손과 담대함의 조화는 청중들에게 큰 호소력과 설득하는 힘의 근거입니다. 세례 요한은 매우 유명한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설교 현장에는 언제나 수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었고, 급기야 당국에서는 조사 요원을 파견해서 요한의 정체를 알아봅니다. “네가 누구냐?”는 질문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조사팀이 또 “네가 엘리야냐”고 묻자 그는 “아니다”고 대답합니다. “네가 선지자냐?” 묻자 “아니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뚜렷하게 밝힙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요한은 자신이 위대한 메시아의 예표인 엘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자신이 감히 메시아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대신 메시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로 자신을 낮춥니다. 요한의 자연적인 태도 속에는 겸손함과 담대함의 조화가 나타납니다.
설교자의 겸손과 담대함의 조화를 C. S. 루이스는 중세의 강인한 기사도에 비유합니다. “기사는 피와 강철의 사람으로서 으깨진 얼굴과 잘려나간 팔다리가 이리저리 낭자한 광경을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집안에서는 너무나 얌전하여 마치 시중드는 하녀와 같이 상냥하고, 겸손하며, 눈에 띄지 않는 정숙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포악함과 유순함 사이에서 타협하 거나 중용을 지키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극도로 포악하면서 동시에 극도로 온유합니다.” 루이스는 겸손과 담대함이 합쳐저서 조화를 이루는 상태는 사람의 노력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이 그 리스도의 탁월성을 재생산해 낼 때만 실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하지만 권능의 사람, 의롭지만 은혜의 사람, 권위 있으면서 동시에 긍휼이 넘치는 설교는 성령의 지배 하에 나타납니다.
이런 조화는 모든 위대한 설교자의 삶과 사역에 나타났습니다. 회중들은 그들의 일상에서 사랑, 겸손, 온유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설교단에 올라서면 치솟아 오르는 권위를 품고 천둥소리를 발했습니다. 이에 관한 최초의 예는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요인은 다름 아닌 그의 평상시의 성품에서 흘어나왔습니다.
그가 빌립보에 거주할 때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니”라고 자신의 유약함을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메시지는 “속임수나 부정함에서 나지 아니하였고 간사함으로 한 것도 아니었노라”고 자신의 정직성을 밝힙니다. 청중들을 향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고, 그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일상에서 부드럽고 겸손한 자세와 애정어린 따스함로 청중들과 함께 하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 결연한 자세가 위엄과 고결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겸손과 담대한 성품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무한한 위엄과 영광이 가장 낮은 겸손과 온유로 결합되어 있고, 무한한 정의가 한없는 은혜로 조화를 이루며, 절대적인 주권과 통치가 완전한 복종과 순종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어린양입니다. 설교자는 예수를 닮아야합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