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법, “생명으로 이끄는 신성한 원칙”
법은 인류 문명을 지탱하는 근간이었습니다.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피트가 “법이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고 경고했듯, 법은 권력의 폭주를 막는 제어장치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을 “감정이 배제된 이성” 으로 정의하며, 그 공공성을 찬양했습니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법과 제도는 인간 정신의 진보와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고 법의 고유 가치를 언급했습니다.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해 “국제 연맹”을 창설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실효성 있는 법이란 공동체가 이미 도달한 도덕적 판단을 입법 형태로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며 법의 내면적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 유대인 군종신부는 군인들 앞에서 “성문법은 관습법에 기반하고, 관습법은 도덕법에 기반하며, 도덕법은 신성의 법 (Divine Law)에 기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만든 법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께서 부여한 영원한 질서와 맞닿게 됩니다. 성경과 고대 사회가 주목했던 ‘법’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법’ 또는 ‘율법’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노모스”입니다. 이 단어는 현대 영어 속에서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가정 (oikos)의 관리 규칙에서 유래한 “경제학 economics),” 작업 효율성을 연구하는 “인체 공학 ergonomics,” 남의 지배를 받지 않는 스스로 결정하고 운영하는 “자치적인 autonomous,” 그리고 입법 과정과 관련된 “법칙 정립적인 nomothetic”이라는 단어 등이 모두 노모스라는 뿌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헬라 문명 속에서 노모스의 원래 의미는 “올바른 것” 혹은 “정당한 것”을 뜻했습니다. 이후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도시국가(Polis)가 발흥하면서 이 단어는 점차 “법적 규범”이라는 제도적 의미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노모스는 단순한 인간의 규칙을 넘어 “신성한 원리나 법”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노모스를 “도시를 다스리는 규범과 원리”로 보았으며, 그의 제자 플라톤은 이를 “질서 있고 문명화된 사회가 작동되도록 하는 보편적으로 수용된 원칙”으로 정의했습니다.
헬라적 배경 속에서 유대인들은 노모스에서 전혀 새로운 신적 권위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인 (LXX, 70인역) 을 편찬하면서 하나님의 법, 즉 십계명과 율법을 노모스로 번역했습니다. 희랍어 학자 키텔의 설명에 따르면, 70인역과 유대 전통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법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건이 없는 “무조건성”을 띠며, 주로 “~하지 말라”는 금지의 형태를 취합니다. 또한, 그 목적은 유대인들을 위압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여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데 있었으며, 표현의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와 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포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노모스, 즉 율법은 총 195회 등장합니다. 이 중 대부분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체결된 “옛 언약”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율법을 귀하게 여기셨고 그것에 대해 자주 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근본이자 핵심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유년 시절부터 평생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율법에 순응하는 삶이었으며, 자신의 사역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하고 완성하러 온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이 계명들을 “하나님의 법”으로 존중했습니다. 일례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계명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법은 종종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도들을 박해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수호하는 정의롭고 의로운 행위”라고 확신하며 행동했습니다.
많은 경우 복음서와 서신서 안에서 이 율법은 “모세의 법”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인간의 행위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 (행함)로는 결코 구원을 받거나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단호히 선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법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거룩한 안내자로서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율법 자체는 선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인간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구원의 원천으로서는 결코 불충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각자가 가진 빛 (계시)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데,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결국 그 엄격한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을 바울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주지 못하는 옛 법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번에 완전한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유대교의 복잡한 제사 제도를 폐지하시고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에게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는 “거울”의 역할이고, 둘째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초등교사 (가정교사)”의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법이 부여되었습니다. 이 “새 법”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지구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지상 명령입니다. 이 복음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영적 세대, 즉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옛 조문에 매인 법이 아닌 새로운 법의 통치 아래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 법은 “성령의 감동과 역사”에 의해 청동이나 돌판이 아닌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법이며, 죽음과 정죄가 아니라 “생명”을 만들어내는 법입니다. 이 사랑의 법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질 의무를 지게 됩니다.
이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뜨거운 전도적 관심을 품게 되며, 온전한 순종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법을 따르는 삶은 마침내 다가올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영광의 현현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다리게 만듭니다. 모세의 법이 인간의 철저한 죄인 됨을 들추어냈다면, 그리스도의 법은 그 죄인을 살리는 구원 그 자체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죄를 일시적으로 덮었으나,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고 뿌리 뽑았습니다.
법이 무너지면 사회는 방종과 폭정에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법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단순히 조문을 지키는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법이 가리키는 궁극의 본질인 “사랑과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잡는 거미줄 같아 보이는 인간의 법적 한계를 넘어, 우리를 참된 자유로 인도하는 성령과 그리스도의 법에 우리 삶의 닻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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