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병이어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_본문 : 요한복음 6:5~13
코막스벨리한인교회 김범 목사
서 론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모인 무리의 곤핍함을 주목하셨고, 그들에게 무엇이든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빌립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
만약 동일한 상황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어떻게 대답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약 2,000명의 성도가 모였으나 먹을 것은 전무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갑자기 이들을 먹이라고 명령하신다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성경을 읽으며 빌립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안드레는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이분법적인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그러나 과연 빌립을 단지 믿음 없는 자로만 치부할 수 있는지는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메시지를 전하는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자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향해 “내가 맡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빌립에게 던지셨던 그 질문은 여전히 세대를 넘어 우리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고 깨달아야 할 삶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적 상식을 넘어 믿음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빌립의 반응은 인간의 관점에서 지극히 현명하고 현실적인 상식에 기반한 판단입니다. 빌립뿐만 아니라 우리 중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비슷한 계산과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의 행보는 이러한 세상의 상식과 결을 달리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도래한다면 상황은 어떠하겠습니까? 빌립의 태도는 그저 믿음의 결여입니까, 혹은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합리적인 지혜입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가 이처럼 상식의 자리와 믿음의 자리 사이에서 갈등하곤 합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철저히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 영위하고자 하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생각들이 오히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빌립의 시선 앞에는 분명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을 먼저 채운 것은 수많은 무리를 먹여야 할 빵의 양과 막대한 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데이터였습니다. 경험과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이 거대한 필요를 채운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눈앞의 상황보다 훨씬 크신 예수님의 현존을 먼저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믿음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적당히 타합하고 현실적인 선을 유지할 때 세상은 그것을 ‘지혜롭고 균형 잡힌 신앙’이라 칭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명시하는 성도의 본질적인 삶의 방식은 상식이 아닌 오직 믿음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포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역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이 믿음은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확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먼저 바라보고 믿습니까, 아니면 환경과 사람을 먼저 주목합니까? 불행히도 인간의 본성은 눈앞의 현실을 먼저 인지하는 상식적인 모습에 더 익숙합니다.
그러나 상식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최초로 직면한 성은 여리고였습니다. 정탐을 위해 파견된 두 인물은 기생 라합의 처소에 머물게 되었고, 이 사실을 인지한 여리고 왕은 군사를 보냈습니다. 사회적 신분이 미천했던 라합에게 있어 가장 ‘현명하고 상식적인 선택’이란 정탐꾼들을 고발하여 보상금을 얻고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라합에게는 이미 하나님을 향한 거대한 믿음이 존재했습니다. 그녀는 현실적인 이익과 생명의 안전이라는 세상의 상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숨겨주며 생명을 건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선택은 결국 그녀의 온 가족이 구원을 얻는 은혜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이 기생 라합이 믿음으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여 멸망을 면했다고 증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의 선포처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일상의 당면 과제나 교회의 사역 앞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상식 뒤에 숨지 않고 믿음으로 상황을 직시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진정한 지혜는 인간적 계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둘째, 들은 말씀에는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순종에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또한 주님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6절이 밝히듯, 주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행하실 일을 완벽히 인지하고 계셨으며 단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셨을 뿐입니다.
안드레 역시 갈릴리 벳세다 출신의 어부로서 주님의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현실 감각이 없는 무지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의 음성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였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그는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남자만 5,000명이 모인 상황에서 아이의 도시락에 불과한 오병이어를 주님 앞에 들고 나아가는 것은 이성적으로 무모하고 부끄러운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주변의 회의적인 시선이 두려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자신이 가진 것의 부족함보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군중 속을 헤치며 공급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실천이자 믿음의 행동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참된 성도의 특징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기적과 복을 경험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이 보기에 미련할 정도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이 전격적인 선택을 받았음에도 결국 버림받은 원인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신의 내면적 욕망과 정치적 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반면 십자가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관과 한계를 배제하고 오직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 손에 없는 것까지 찾아 나서는 영적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가부(可否) 판단을 넘어 순종의 걸음을 걷는 자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배후에는 이미 우리의 길을 완벽히 아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의 증언처럼, 믿음은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모든 것을 주님의 손 위에 전적으로 의탁해야 합니다
안드레는 믿음의 사람이자 말씀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그는 자신이 찾아낸 미미한 오병이어를 최종적으로 주님의 손에 올려드렸습니다. 이 의탁의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과 순종의 행보를 보이는 듯하다가도, 결국 주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해 좌절을 경험하곤 합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능력으로 무리를 먹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진 오병이어는 결국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삶을 맡긴다는 것의 실질적인 증거는 바로 ‘기도’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은 성도가 기도로 전적인 신뢰를 고백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 맡기는 행위 자체가 강력한 믿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하며 말씀대로 살고자 고군분투하지만, 정작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기도의 자리에는 나아가지 않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말씀대로 살아내는 신앙의 동력 또한 우리의 의지가 아닌, 기도를 통해 주님의 손에 의탁 될 때 주께서 친히 성취하시는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보는 눈과 함께 기도의 입술이 열려야 합니다. 기도는 내 삶의 통치권을 주님께 이양하여 주께서 친히 일하실 영적 공간을 확보하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사역 역시 기도의 연속이었습니다. 신성의 본체이신 주님께서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 의하면 주님은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 밤이 새도록 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으며, 대속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본격적인 기도의 무릎입니다. 안드레가 미약한 것을 주님께 드렸을 때,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도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은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고 이를 위해 깨어 구하기를 힘쓰라고 명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은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기도로 모든 것을 위탁하는 자들의 삶 속에 비로소 나타납니다.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기도는 관념이나 지식이 아니며, 기도의 실천이 결여된 이론은 무력할 뿐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자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신실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결 론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성의 본체이심을 천명한 놀라운 사건입니다. 동시에 이 기적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지녀야 할 마땅한 믿음의 삶의 모양을 제시해 줍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세속적 합리성과 평범함의 틀을 과감히 탈피하여 오직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청종함으로써 순종의 첫걸음을 내딛고, 매 순간을 기도로 주님의 손에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오병이어의 기적과도 같은 은혜의 역사가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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