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아! 그런뜻이었구나  “왕께 하는 호소,” 중보기도

[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왕께 하는 호소,” 중보기도

 “왕께 하는 호소,” 중보기도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통쾌하게 보여줍니다. 그러자 바알 선지자들을 지지했던 이스라엘의 왕비 이세벨이 진노하여 그를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엘리야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도망칩니다. 수 마일을 달린 후에 그는 지쳐서 잠시 멈춰 섭니다. 두려운 가운데 그는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을 헐어 버렸고, 이제 저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라고 외치며 호소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1:2에서는 엘리야의 호소를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라고 기록합니다. 영어 성경 NRSV는 “그가 하나님께 탄원했다”고 번역하고, KJV은 “그가 하나님께 중보기도 했다”고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서로 다르게 번역된 희랍어는 “엔테욱시스”입니다. 일반적으로 중보기도 (intercession)로 알려진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신다는 말씀은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곳에 사용된 간구하다는 희랍어가 엔테욱시스입니다.

   고전 그리스 사회에서 이 단어는 “사람을 만나다,” “깊은 교제에 빠지다,” 혹은 “아무개와 교섭을 시작하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말을 하고, 그 사람도 우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 낱말은 사람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 발전됩니다. 마음 속의 깊은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는 이 낱말의 사용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슬픔과 절망이 아닌 매우 선한 것으로 희망이었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무 (無)가 되어 무의식의 상태로 변하는 것이 아닌, 인간존재의 실체인 영혼이 거처지를 옮기는 것이며, 인간은 새로운 처소에서 역사적 인물들과 만나는 기회였습니다. 이전에 죽었던 유명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 죽음은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 저명했던 “오르페우스, 무사에우스, 헤시오도스, 그리고 호메로스와 같은 영웅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지불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몇 번이라도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영웅들과의 만남은 절대 가치였고,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자신처럼 부당한 심판으로 목숨을 잃은 고대의 현인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은 자신에게 최상의 위로가 되기 때문에 죽음은 선 (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앞서간 위대한 선인들을 만나 친밀한 교제를 갖는 것은 죽음이 가져오는 보상이었습니다. 그가 반복해서 표현하는 영웅들과의 만남과 교제는 희랍어 엔테욱시스입니다.  

   단순한 만남과 교제의 뜻을 가졌던 이 단어는 오랜 시간 속에 호소하고 탄원하는 의미로 진화됩니다. 자신의 억울함과 부당한 대우를 권력 집행하는 높은 기관이나 왕에게 청원하는 말로 정착합니다. 예를 하나 소개합니다. 기원전 32-22년에 카이로 남쪽에 위치했던 멤피스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나일강 주변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는 멤피스에 세워졌던 세라피스 신전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쌍둥이였던 타우와 타우스는 세라피스 신전에서 여사제로 복무했습니다. 그곳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약속한 임금을 받지 못한 그녀들은 왕에게 탄원서를 보냅니다. 탄원서에는 자신들의 정당한 대우와 함께 더 나은 삶을 적고 있으며,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의 처벌을 요구합니다. 그녀들이 보낸 탄원서를 희랍어로 엔테욱시스라 했으며, 법적 구속력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소개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유다 마카베오가 기록한 역사 책에 왕을 만나러 가는 한 애국자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시몬은 나라를 배반하고 유다 사람들을 살육할 뿐만 아니라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자였습니다. 오니아스는 시몬의 악행이 점점 더 심해지는 상태를 보면서 왕을 찾아갑니다. “그 목적은 자기 동족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 백성 전체적인 이익과 개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오니아스는 왕의 조정이 없으면 이 나라는 앞으로 평화를 누릴 수 없을뿐더러 시몬은 자기의 어리석은 행위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니아스가 왕을 찾았던 이유는 국가와 백성의 유익을 호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왕을 찾아간 그의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는 희랍어 엔테욱시스로 “왕께 청원하다” 혹은 “왕께 간청하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낱말은 공격을 받아 무너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로 사용됩니다. 신앙생활은 매 순간이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는 전쟁터과 같다는 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영적 생명이 파괴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입니다.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전쟁이라 칭하면서, 바울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는 원인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간구, 즉 엔테욱시스는 법정에서 간청한다는 의미입니다. 

   위험에 처한 성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엔테욱시스라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결코 제사장의 일을 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엔테욱시스를 “돕는다”고 번역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용되는 이 낱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반 기도와는 다릅니다. 승리 확보를 위한 도구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청원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한 개인의 삶을 승리로 이끌고,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와 한 국가를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청원하는 것입니다. 

이남규 목사 (Ph.D.).

spot_img

최신 뉴스

인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