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 답안
이천 여년 전 예루살렘에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매년 그러하듯, 유월절을 지내기 위한 운집이었다. 첫 번째 종려주일의 이야기이다. 유대의 산과 호수, 거리에서 예수가 베풀었던 기적과, 특히나 예루살렘에서 한 오 리쯤 된다는 베다니의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일은 예수에 대한 군중의 환호에 불을 지폈다. 그의 제자들은 나귀 새끼의 등에 자신들의 겉옷을 얹어 안장을 대신했고,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거리에 옷을 깔아 어린 나귀에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를 맞았다.
이 환대는 고대의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나 왕의 행렬의 모습과 닮은 듯 하나 실상 다름이 더 이 사건의 의미를 더한다. 우선 전쟁의 승리를 이미 거두고 왕들은 행진을 했으나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 후 더 큰 임무가 있었다. 승리에 대한 상과 명예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이라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왕들의 전쟁은 상대편 사람을 죽여 나와 내 편을 살리는 일이라면, 예수의 임무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 자체가 정복의 대상이었고, 그 죽음을 정복하는 방법은 유일하게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다. 예루살렘 입성 전에도 그의 행적은 병을 고치고, 먹이며,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것들이었으며, 입성 후 십자가에서는 자신의 생명마저 끊어졌으나 살아났으니 진정 죽음을 정복한 승리를 거둔 셈이다. 이를 알 수 없었던 군중들은 예수를 로마의 압제에서 풀어줄 정치적 메시아로 오인했고, 유대 민족의 지도자들은 그의 죽음을 모의했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군중의 환호가 로마의 이목을 끌어 식민 상황을 악화시켜 민족이 망할 수도 있다는 구실을 만들어서 말이다. 자신들의 예수에 대한 질투와 시기를 뒤로 감춘 채. 결국, 군중들의 환호는 십자가에 그를 못 박아 죽이라는 함성으로, 승리를 상징하던 종려나무 가지는 가시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시편 24편은 이 군중들이 이미 알았어야 하는 승리의 왕을 맞는 자세를 일러준다. 시편이 제시하는 귀감이 될 만한 군중의 시선과 생각을 따라가며 살펴보자. 우선 1절에서 군중의 시선은 온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이것이 바른 시작이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들이 바다와 강으로 표현되는 혼돈함 위에 터를 세우신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인정한다 (2절). 그리곤 군중의 시선이 넓은 세계에서 한 산으로 이동하며 모아지고 질문을 한다. 이 산은 ‘여호와의 산’으로 불리는 곳인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자인지를 묻는다(3절). 3절에서 6절까지 그 곳에 설 수 있는 자에 대한 자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손이 깨끗함과 마음이 청결함을 언급하며 내적, 외적 순결함의 조건을 명시한다. 또 허탄한데 마음을 두지 않는 기준으로 우상이나 거짓된 가치를 따르지 않을 것,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특히나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라는 구문은 제사장이 제사에서 제물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연상시키듯 “자신의 영혼을 헛된 것에/헛된 것을 향하여 들어올리지 않은 자
( אֲשֶׁ֤ר לֹא־נָשָׂ֣א לַשָּׁ֣וְא נַפְשִׁ֑י / who has not lifted up to vanity his soul)”로 표현된다. 이렇게 행동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복을 받고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제시한다 (5절). 그런데 이런 이들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6절).”라고 부연하고는 “셀라”를 덧붙여 잠시 숨을 고르고 방금 읽은 구절들을 되새겨 보도록 휴지기를 준다.
그러고 나서는 군중의 시선을 잡아 그 산에 설 자를 보라는 듯이 분위기를 전환하여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법을 사용하여 말을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7절).” 군중은 성의 수문장과 같은 마음이 되어 묻는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그러자 왕의 행렬을 인도하는 자가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외친다 (8절). 어떻게 된 일인가? 사람 왕을 기대했을 법한 군중에게 돌아온 답은 세상의 터를 건설한 주권자 여호와가 직접 그 성에 들어가신다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 기준을 통과해야 그 산에 설 수 있다 이야기 했으나 결국 그 기준을 초월하는 “만군의 여호와” 자신이 들어가게 된다. 창조주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데 있어서 그 신 자신이 군중 앞에 서서 이끌게 된다. 군중은 왕의 행렬의 뒤를 따를 때 영광의 왕에게 머리를 든 문을 통하여 성에 들어가게 된다. 들어갈 수 있는 자를 찾아 맞이하려던 군중은 행렬을 따라가 왕과 함께 거룩한 곳에 서게될것이다. 시편 본문은 이 질문과 답을 두 번 반복함으로 확신의 선포를 한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19: 42)”라고 한 말씀은 시편의 예를 따르지 못했던 첫 번째 종려주일의 그때 그 군중을 의미하셨을까?
김카리스 (구약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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