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여명
김카리스 (구약학 박사)
이스라엘에 유학 시절 TV 뉴스에 나온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이스라엘 남자 예비군 두 명이 운전 중 길을 잃어 팔레스타인 지역의 경찰들에게 잡혀 경찰서에 감금된다. 그 날 그 지역에서는 마침 이스라엘 군에 의해 죽음을 당한 팔레스타인 한 소년의 추모식이 있었다. 천여명의 추모객들은 그 경찰서에 침입해 이스라엘 예비군 두 명을 무력으로 붙잡아 가서 한 이 층 집에 가두고 집단 린치를 가했다. TV 화면에는 집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의 아우성과 집안의 이 층 방 창문을 통해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잡혀간 이들을 칼로 찌른 피 묻은 손이 창문을 통해 보였고, 곧 이어 이스라엘 예비군복을 입고 건장한 체구를 가졌으나 그 순간 무력한 한 남자가 발목이 잡혀 머리부터 창밖으로, 성난 군중이 서 있는 땅으로 떨어뜨려지는 장면이 방송되었다. 그의 시체는 더이상 화면에 보이지 않았으나 이를 둘러싼 군중의 움직임은 계속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폭력성으로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 매겨진 영화의 장면이 아니라 실제 사건이었다는 것이 초현실적이었다. 며칠 후에 이스라엘은 어찌어찌 그 시체를 돌려 받아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묘지에서 그 죽은 자의 형제의 뉴스 인터뷰 또한 전파를 탔다. 그는 오열하며 형제를 죽인 자들을 “사탄의 자식들”이라 불렀다. 이 표현은 현대 히브리어에서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 아니었다. 일부러 성경의 단어들을 빌려와 극도의 분노를 표현한 그의 절규는 성경과 그 언어를 배우려 이스라엘에 있던 나의 귀에 더 깊이 박혔다. 야만적 폭력의 이야기다.
지난 주, 고난 주간이 지나갔다. 고대 로마제국의 잔인한 십자가 처형장에서 있었던 삼 십대 청년 예수에 대한 사형 집행은 사실 무고한 자에 대한 것이었던 점에서 불법이고 폭력이었다. 또, 죄수의 옷을 다 벗기고 그 처형을 만인에게 생중계하듯 처형 틀을 높이 세워 전시하는 그 방법도 지극히 야만적이었다. 더욱이 그의 십자가 곁에는 육신의 어미 마리아와 이모, 사랑하는 제자 요한 등이 그 처절한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요 19:26-27). 시편 22편에 그 야만을 감당했던 예수에 연결되는 묘사와 대사가 담겨 있다.
개역개정 성경의 1 절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로 다음 히브리어 문장을 번역하였다.
אֵלִ֣י אֵ֭לִי לָמָ֣ה עֲזַבְתָּ֑נִי
רָח֥וֹק מִֽ֝ישׁוּעָתִ֗י
דִּבְרֵ֥י שַׁאֲגָתִֽי׃
첫 줄이 우리가 잘 아는 ‘가상 칠언’ 중 하나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27:46; 막 15:34)”의 기원이 되는 문장이다. 단지 마지막 단어가 아람어와 히브리어가 달라 ‘사박다니’가 ‘아자브타니(עֲזַבְתָּ֑נִי / you have forsaken or left me)’로 바뀌어있을 뿐이다. 신문 지면 편집상 둘째 줄, 셋째 줄에 위치 시킨 그 다음 구절을 거칠게 직역하여 원문의 어순대로 덩어리 지어진 단어들을 늘어놓자면 ‘멀리, 나의 구원으로 부터, 말들, 나의 절규의’ 정도이고 어순을 조금 조정해서 의미가 통하게 하자면 ‘나의 구원으로 부터 멀리. . . 나의 절규의 말들. . . ’이 될 수 있다. 맞다. 개역개정은 원문의 단어와 단어 사이, 비어 있는 단어들을 채워 넣어 의미가 전달되도록 의역하였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 히브리어 원문에 기록된 시편 화자의 발화는 약 천 년 뒤, 십자가상에서 발가벗겨진 채 육신의 어머니와, 친척, 제자, 지인들, 야유하는 군중들, 또 형을 집행하는 로마 군인들에 둘러싸여 죽음의 문턱 앞에 있는 그 예수의 거칠어진 호흡과 간신히 내뱉는 단어 수와 닮아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가상 칠언에 위의 둘째 줄, 셋째 줄 문장은 없지만 말이다. 속으로 삭이는 말들을 갖고 시편의 화자는 고통을 호소한다. 내가 ‘절규’라고 번역한 ‘שַׁאֲגָתִֽי’ 는 목청껏 울부짖는 사자의 포효나 고통 받는 자의 창자에서 끓어 오르는 신음으로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이렇게 시작하는 시편 22편은 노래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한글 성경에는 표제어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에 맞춘 노래”라고 적혀있다. 즉, 이스라엘 제의에서 지휘자가 있는 합창에 쓰인 곡이다. 여기서 ‘아얠렛샤할’은 히브리어로 “אַיֶּ֥לֶת הַשַּׁ֗חַר” 로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새벽 미명의/여명의 암사슴 (the Doe of Dawn)’의 의미다. 학자들은 이를 어떤 곡조를 칭하는 것으로 여긴다. 어둠을 밝히며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고 있는 암사슴의 이름을 가진 곡조는 어땠을까?
가장 고통의 순간에 예수가 사용했을 정도로 영혼의 아픔을 토로하는 문장으로 이 시편은 시작하지만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23-24).
그가 느낀 여명의 희망은 이런 믿음으로 반응한다.
지금 이란 초등학교 폭격으로 전쟁터가 아니라 학교에 보냈던 어린 자녀들을 졸지에 잃은 어머니들, 그 야만에 대한 그들의 절규 또한 여명을 만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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