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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칼럼 김 카리스 교수의 구약의 베일을 들추며 나는 마지막 여정에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가?

[칼럼: 구약의 베일을 들추며] 나는 마지막 여정에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가?

나는 마지막 여정에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가?

이스라엘 국적기인 ‘엘알’ 항공기를 처음 타봤을 때 일이다. 비행기 안에는 단체 해외 관광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듯한 유대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수 십분 타고 계셨다. 내 옆에 앉으신 할머니 손목에는 빛바랜 숫자 여럿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나치 유대인 수용소의 죄수 번호. 그때는 자유의 삶을 누린지 수십 년 되었을 무렵이었겠으나 여전히 그 숫자는 그녀의 몸에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 활주로에 비행기 바퀴가 닫자, 이 할머니, 할아버지 그룹은 기장의 무사 도착 운항에 대해 박수를 쳐 주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헤베누 샬롬 알레헴”이란 노래로 ‘우리가 너희에게 평화를 가져왔다’라는 뜻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본국에 도착했을 때 그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 짧지만 경쾌한 곡조에 한껏 웃음을 지으며 부르는 그들의 모습이 내 기억에 사라지질 않는다. 

시편 130편의 첫 줄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노래의 ‘용도’가 적혀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שִׁ֥יר הַֽמַּעֲל֑וֹת (A Song of the Ascents)로, 이를 직역 해본다면 ‘오름/올라감의 노래’도 한 선택지이겠고,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 정도로 의역을 할 수 있겠다. 한글 번역처럼 ‘성전’을 넣으면 노래의 정황이 더 확실해진다. 앞에서 신경 쓰지 않았던 ‘오름’의 히브리어 복수 형태를 ‘동작의 빈번함’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를 따르자면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엘알’ 비행기에서 합창하던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소년으로 성전에 오르는 대열에 함께 하셨던 예수도 이 시편을 부르셨을까(눅2:41-42)?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시편의 저자는 ‘오름’의 바로 다음 단어에 ‘깊음’을 배치해 놓았다는 것이다. 원문에서는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라는 문장에서 “깊은 곳에서”가 가장 먼저 나온다. 성전에 올라가는 시인은 내 안에 깊은 곳에서부터 그 ‘오름’의 이유, 동기가 있음을 밝힌다. ‘오름’과 대비되어 ‘깊음’의 깊이가 더 까마득하다. 지면의 골짜기가 아니라 수면 밑의 큰 물고기 뱃속 정도 되려나? 그러곤 호소한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 시편 화자의 공간적, 심적 위치로 인해 그의 호소가 더 진하게 들려온다 (2절). 그의 속내는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는 질문으로 표현된다(3절). 성전으로 올라가는 화자의 마음속에는 이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거룩하신, 죄와 함께할 수 없으신 여호와가 ‘죄악’을 지켜보신다면 그분이 계신 성전에 내가 설 수 있을까? 그러나 화자가 성전을 향해 계속 올라갈 수 있는 용기는 하나님의 속성, “사유하심(forgiveness)”이라는 속성에 의지함으로 나온다 (4절). 사유하시는 여호와와 그 말씀을 바라기에 계속 산을 오를 수 있다(4-5절). 그 바람은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기다림 보다 더 간절하다고 비유한다(6절). 여기서 시인이 이 시를 쓸 때 가장 공을 들이지 않았을까 싶은 단어가 나온다. 아까 화자의 마음속에 있던 질문에서, 그러니까 죄악을 지켜보시는 여호와를 언급할 때 쓰였던 “지켜보실 (תִּשְׁמָר)”이란 말의 어근이 “파수꾼(מִשֹּׁמְרִ֥ים)”과 파수꾼의 “기다림 (  שֹׁמְרִ֥ים  )”과 같다. 죄악을 ‘감찰’하는데 쓰였던 그 단어가 그 죄악을 사유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림’으로 역전되는 반전이다. 화자는 여호와께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다 자신의 공동체로 시선을 돌린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7-8절)”

그들의 이 노래는 이 희망을 품고 성전에 도착함으로 끝이 난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 인생 여정의 마지막 도착지는 무덤일 것이다. 무덤의 비문에 사자 인생의 키워드를 적기 마련인데 노래로 적은 사람을 보았다. 미국 팬실베이니아 몽고메리 카운티, 내가 몇 년 거주 했던 동네의 묘지에 한국인도 아닌 백인 남자의 묘비에 한글과 영어로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Nothing but the blood of Jesus”라고 적혀있었다. 한인 묘지가 조성된 곳도 아닌 장소에서 본 참 생경한 장면이었다. 한국에 파송되었던 부친 William B. Hunt (한위렴) 선교사의 아들로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난 Bruce F. Hunt (한부선) 선교사의 묘지였다. 그는 1938년도에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노회에 반대하다 옥고를 치른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칠십 대 후반에 한 인터뷰 기록을 보면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에 관해 묻는 이에게 어렸을 때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 집에 한국 사람들이 일하면서 그 시절, 이 찬양을 부르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한다. 그 찬양이 그의 인생 마지막 여정인 무덤까지 이어졌다. 시편 130편, 죄악의 사유하심이 주께 있다고 노래하며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을 사람들처럼 헌트 선교사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음을 노래하며 여정을 마쳤다(히10:7). 나는 마지막 여정에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가?  

김 카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