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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구약의 베일을 들추며] 뭐가 사랑이야?

뭐가 사랑이야?

김카리스

이스라엘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저는 그다지 현대 이스라엘 대중 음악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들어 본 몇 안되는 노래 중 강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은 노래가 있습니다. “Ma Zot Ahava ( מה זאת אהבה / 뭐가 사랑이야?)”라는 제목인데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내게 사랑이 꽃이라고

사람들은 내게 사랑이 불이라고 

당신은 내게 사랑이 시냇물이라고 

사람들은 내게 사랑이 꿀이라고 

뭐가 사랑이야?

뭐가 사랑이야?

사랑엔 뭐가 필요한데?

사람들은 내게 사랑이 불이라고

사람들은 내게 사랑이 꿀이라고

에덴동산은 터무니없이 작고 

그 경계는 지옥이야

그런데 천사들은 그곳에서 노래하고 있어

실수로 따버린 단 하나의 금지된 열매

겨우 그걸로 우리는 꿈속에서 쫓겨났어

이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알게 하는 것(이성/지혜)을 

혼란스럽게(미치게) 해버려

사랑은 에덴동산의 한 순간을 안겨준 뒤

널 추락하도록 내버려 두는구나

이 노래 가사는 성경의 인류의 죄로 인한 타락 이야기에 대한 반기였습니다. 더욱이 현대 히브리어로 히브리어 성경을 공부한다는 자부심이 있던 저에게 이 노래가 현대 히브리어로 쓰인 것은 사뭇 어떤 권위의 옷을 입고 있어서 쉽게 반박하기 힘든 비판을 저에게 퍼붓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노래는 ‘먹는 것 하나 가지고 사랑 하기를 거둬들인 것이 진짜 사랑일까? 이게 사랑이야? 뭐가 사랑이야?’라고 묻습니다. 

사실 이 주제나 이에 대한 비판은 인류의 여러 문학 작품에 등장합니다. 메리 셀리는 자신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과학자의 윤리적 금기를 깨고 시체들을 조합해 인공 생명체를 만들고는 자신의 피조물이 괴물이 되자 유기해 버리는 모습, 즉, 자신의 창조물을 책임지지 않는 신의 무책임함을 묘사합니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 사탄은 “단 하나의 열매를 까닭으로 온 인류를 추락시키는 자가 과연 정의로운가?”라고 묻습니다 (사실, 스타인벡은 하나님이 피조물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준 것으로, 즉, 인간이 존엄성을 부여 받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또, 마크 트웨인은 ‘지구에서 온 편지’에서 “불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불에 손을 대었다고 해서 온몸을 태워버리는 것과 같다”며 신의 비합리성을 풍자합니다. 

하지만, 과일 하나 먹지 말라는 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명령은 죄의 청정 지역이던 에덴에서는 시금석 같은 역할을 했었습니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궁창에 먹물 한 방울과 달리 거장의 수묵화 작품이 그려진 화선지에 튀긴 먹물 한 방울은 대수롭게 여길 수 없듯, 에덴에 신과 언약관계에 있던 첫 인류에게 내려진 이 사소해 보이는 명령은 그들의 속 마음을 가늠해 보기에 충분했습니다. 신이 이들을 에덴의 동쪽으로 떠나 보낼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에덴을 건설한 주인이 모든 것을 무상으로 그들에게 제공하며 단 한 가지의 규칙을 주었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어겼으니까요. 불을 몰랐다 하더라도 만지면 탄다는 것을 이미 주지시켰는데 따르지 않았으니 퇴거 명령은 당연합니다. 더욱이, 성경의 다음의 예들은 그들이 어떻게 달리 행동했었어야 하는 지를 보여주어 이 결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습니다. 

시편 63편은 다윗의 시로 여겨지는데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시기이거나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궁궐에서 도망나와 광야에 거하던 때로 생각할 수 있는데 11절의 “왕”이란 단어 때문에 학자들은 다윗이 왕이 된 이후의 일, 즉, 후자의 상황일 것이라 많이들 생각합니다. 광야에 있는 다윗의 삶의 정황이 앞에서 소개한 노래 속에서 화자가 자신과 동일시 하는 아담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으로 대표되는 에덴이나 예루살렘에서 떠났다는 면에서는 두 인물을 어쩌면 같은 처지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슷한 상황 속에서 앞의 노래 속 화자와는 다른 마음 가짐을 다윗은 보여줍니다. 먼저  2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광야로 쫓겨가기 전 예루살렘 성소에서 어떠했는지 말합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에덴에서 먹지 말아야 했던 것에 눈을 돌려 탐심을 품게 되고 결국 그것을 취해서 여호와의 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아담과 하와와는 달리 다윗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해 주를 바라봅니다. 주의 임재의 상징인 성소에 머물지 못하고 광야에 있는 지금도 그는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뭐가 사랑이야”라는 노래에서 화자는 에덴 밖은 지옥인데 수긍할 수 없는 사소한 일로 에덴에서 쫓겨난 후로는 자신의 추락에 무관심 한 사랑의 주체에게 그까짓게 사랑이냐고 묻습니다. 그 지점과 전혀 다른 태도를 다윗은 가졌습니다. 다윗도 그의 인생에서 추락의 시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머물지 못하고 광야에 있는데 ‘여긴 지옥’이라 한탄하지 않고 여전히 주를 갈망하며 간절히 주를 찾고 주를 앙모합니다. 주를 갈망하는 것이 그 간조한 광야에서 물을 찾는 갈급 함 만큼이나 큽니다. 압살롬의 반역과 그로 인한 결과를 곱씹기 보다 여전히 시선을 주께로 향하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수 많은 열매 중 단 하나 금지된 선악과가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만하게 보이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인해 마치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은 것처럼 만족하다고 합니다. 금지된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도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광야에서도 “주의 날개 그늘”을 경험합니다. 광야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합니다. 에덴 밖이 지옥이라 내쫓김을 원망하는 앞의 노래의 화자와는 정확히 다른 모습 입니다. 

둘째 아담, 예수도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1:12). 예수는 공생애를 먹는 것을 스스로 금하는 금식으로 시작합니다.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어 갈한 땅 광야에서 예수는 사십일간 먹지 않습니다. 사탄이 먹는 것으로 시험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며 넉넉히 이깁니다 (마태복음 4:4).  

다윗과 예수는 아담과 하와와 달랐습니다. 그 전혀 다름의 이유는 아마도 어느 곳에 자신의 침상이 있던지 시편 63편 6절에서처럼 그 곳에서 주를 “기억”하며 주의 말씀을 읊조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사랑이냐는 질문에 이런 다른 선택지를 택한 경우들을 슬며시 저는 들이 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에덴의 동쪽에서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이 더 확실한 답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