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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구약의 베일을 들추며] 큰 기쁨_김카리스

큰 기쁨_김카리스

제 막내 아이는 항상 엄마의 마음을 읽어주려 노력합니다. 아들만 있는 집에 적어도 한 아들은 딸 노릇을 한다는 말이 맞구나 싶습니다. 저는 혹시나 제 표정이 잘못 읽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봐 긍정적인 표현 외에는 얼굴에 다른 감정 표현을 담지 않으려고 평생 신경 쓰며 살아왔는데 그런 저의 표정을 그 아이는 잘 도 알아챕니다. 그래서 참 위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지쳐 보이면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가 좋아, 너무 좋아. 엄마 최고.”라고 제 컴퓨터 검색창에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써놓곤 하더니 청소년기에 접어들어서는 “엄마, 할 수 있어. 이런 일은 엄마만 할 수 있어서 하나님이 엄마한테 맡기신 거야.”라는 둥 제법 저의 상황과 성향을 고려한 맞춤형 말들을 건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엄마의 일상이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 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책상에서 공부와 씨름해온 저의 삶에는 아이가 생각하는 “기쁨”이 부족했습니다. 책을 읽거나 논문을 쓰면서 방긋방긋 웃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요. 더욱이 해답을 찾으려는 연구 문제에 실마리를 찾지 못해 헤매거나 삶이 녹록지 않을 때, 제가 의지한 방법은 책상 밑에 놓아둔 작은 러그 위에 엎드려 조용한 찬양을 틀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은혜로 살았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저는 그 자리에서 종종 울었구요. 어찌 보면 제 기쁨은 웃음 보다는 눈물로 표현되는 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 아이는 제가 다 꺼내 보일 수 없는 속 이야기는 모르니 그 울음이 감사의 울음인지, 기쁨의 울음인지, 슬픔의 울음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겠지요. 아니 아마도 그 울음은 슬픔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담긴 마음이 기쁨과 감사인데 아이는 그 추이를 다 알 수 없었을 거예요. 하긴, 아이가 아기였을 때는 제게 기어와 제 무릎에 얼굴을 대고 따라 울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요 몇 년 사이 저에게 자꾸 뭘 할 때 가장 재미 있냐고 묻습니다. 자신은 스케이트 보드를 탈 때 가장 재미 있다면서요. 물론 스케이트 보드의 한 기술을 익히기 위해 연습할 때는 힘들지만 그 순간도 재미가 있다면서요. 엄마가 재미 있는 것을 찾아서 엄마의 삶이 웃음으로 가득 찼으면 하는 바람의 질문이지요.  

그래서 한 동안 고민이 되었습니다. 내가 진짜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의 삶을 살고 있는가? 주위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나의 그 기쁨은 미미한 수준인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기쁨을 남들에게 권하면서 나는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위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래서는 내 자녀에게 내 삶으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시편 43편에는 시인의 삶의 애환이 잘 드러납니다. 사실 기쁨보다는 애달픔의 묘사가 더 많은 구절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두 절이 슬픔입니다. 

  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사실, 43편은 바로 앞의 42편과 한 묶음인 하나의 시편으로 여겨집니다. 43편 5절의 “내 영혼아”로 시작되는 후렴구가 42장 5절과 11절에서 반복이 되고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탄원의 주제가 같으며 시편의 표제어가 42장에만 등장해서 43장도 아우르는 듯하게 보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42장과 함께 43장을 읽으면 이해가 깊어집니다. 42장에서 시인이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갈망의 정도는 목말라 물을 찾는 사슴에 비유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인의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할 정도로 괴로움의 깊이가 깊습니다. 낙심과 불안이 그를 휩쓸고, 대적의 비방과 조롱의 정도가 뼈를 찌르는 칼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43장에 들어서면서 시인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판단,” “송사,” “변호”등의 법률 용어를 1절에서 사용하며 하나님께서 재판관이 되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재판이 필요할 만큼 극심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고통 가운데서도 시인이 하나님의 “그의 인자하심 (חַסְדּ֗וֹ/ ḥas·dōw)”에 기대어 기도하겠다는 다짐을 42장 8절에서 하는데, 43장 1절에서는 하나님이 송사를 통해 시인을 변호해줄 대상인 “경건하지 아니한 (לֹא־חָסִ֑יד/ lō-ḥā·sîḏ) 나라”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חֵסֵד/ checed)”과 같은 어근의 형용사 “경건한 (חָסִ֑יד/ ḥā·sîḏ) ”에 부정 부사 “לֹא/ not”를 결합한 형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 덕분에 살아가는 사람들, 즉, 그 인자하심을 닮아가려는 “경건한 자”들이 ‘아닌’ 자들이 이 시인을 괴롭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시인이 의지하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그 역경 가운데 시인은 슬프게 다닙니다. 그러나 3절에서 힘을 내어 더 기도합니다. 주의 빛과 진리를 자신에게 보내셔서 인도해 달라고. 그렇게 시인이 인도함을 받아 갈 곳은 “주의 거룩한 산,” “주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예배의 처소입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슬픔을 떨치고 “나의 큰 기쁨”인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수금으로 “찬양”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라고 자신의 영혼에게 설교합니다. 그 예배의 처소에서 만날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설교 입니다. 시인은 그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큰 기쁨”이라 칭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슬픔을 떨치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갑니다.

아이에게 엄마도 “기쁨,” “큰 기쁨”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고 있다고 말해주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