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설교단상 베드로의 부활 요 21:1-14_뉴저지 찬양교회 노승환 목사

[설교단상] 베드로의 부활 요 21:1-14_뉴저지 찬양교회 노승환 목사

베드로의 부활 요 21:1-14

뉴저지 찬양교회 노승환 목사

할렐루야!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신 부활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그러했고 죽음에서 부활하심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시고도 놀라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 삶 가운데 죽음으로 상징되는 그 어떤 모습도, 그 어떤 절망과 좌절도 소망으로, 기쁨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다른 어떤 날 보다도 오늘은 예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소망과 기쁨을 믿음으로 단단히 붙잡으시는 복된 날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영어의 Idiom, 관용구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이해를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어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다 아는 단어들인데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 말이 지금 여기에 쓰이는지를 모르는 경우들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건, 어느 나라 말이나 마찬가지인데, 우리 말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말에 ‘발이 넓다.’ 그러면 사교성이 있다, 많은 사람을 안다는, 뭐 그런 뜻인데 여기서 자라는 2세에게 “야, 너 발이 참 넓다” 그러면 자기 발 size 가 겨우 7인데 뭐 크다 그러냐? 그러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영어에도 이런 표현들이 수도 없이 많고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잘 몰라서 배워야 하는 idiom 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오래전에 제가 영어의 이런 idiom 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유래를 설명해주는 글을 하나 아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죽음과 관련한 주로 1500년대에 영국 쪽에서부터 유래된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저희는 누가 돌아가시면 장례예배를 하고 또 발인예배, 하관 예배를 합니다.

영어로 장례예배를 Viewing service라고도 하고 Wake라고도 하는데 viewing service는 이해가 갑니다. 관을 열어놓고 고인과 마지막 인사하도록 viewing 해드리는 거니까요. 그런데 wake는 일어난다, 깨어난다는 뜻 아닙니까?

이 말의 유래가 참 재미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위스키나 독한 술을 마실 때 납으로 만든 컵으로 많이 마셨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코올하고 납이 섞인 것을 마시면 사람이 거의 죽은 것처럼 며칠 동안을 기절하는 경우들이 간혹 있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렇게 길에 쓰러진 사람을 집으로 싣고 와서 장례 준비를 하면서 혹 깨어날까 식구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깨어날까 기다리며 예배하던 것이 wake service가 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고도 일어나지 않으면 관에 넣어 무덤에 넣는데 땅이 모자라 오래된 관들은 다시 파내고 새로운 관을 묻는데 파낸 오래된 관들을 열어보니까 25개 정도의 하나꼴로 관 안에 손톱자국이 나 있더라는 겁니다. 관에 들어간 후에 깨어난 거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럼 죽은 사람 팔목에 끈을 묶고 관 밖으로 종을 달아 놓아서 혹 깨어나면 그 종소리가 들리게 하자고 해서 그런 경우로 살아난 것이 바로 saved by the bell, 간신히 살았다! 종소리로 살았다! 란 표현이 되었고 그렇게 살은 사람을 dead ringer, 똑같이 닮은 사람이란 뜻인데 분명히 죽었는데 어느 날 살아서 돌아다니니 죽은 누구와 똑같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팔목에 끈 달아서 ring 해서 살았잖아요? 그래서 dead ringer이라 불렀습니다.

그렇게 묘지에서 밤에 혹시 bell이 울리나 지키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graveyard shift, 밤에 일하는 사람들은 graveyard shift 한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자. 혹시 잘 모르시던 영어표현을 새롭게 배우셨으면 예배 마치고 나가실 때 저한 테 영어 lesson 비들 내고 나가시면 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면, 그 옛날에 wake를 하고, saved by the bell 이 되고 dead ringer, graveyard shift 이런 표현들은 사실 이 사람들이 제대로 죽었나? 의학적으로 확인을 잘하지 못하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dead ringer 들은 사실 죽었다 산 것이 아니고 아예 애초부터 제대로 죽지 않았던 겁니다.

진짜로 죽은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반응하지 못합니다. 종을 울리지 못합니다. 진짜 죽은 사람의 특징이 바로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은 사람 앞에 놓고 소리를 질러보세요. 죽은 사람 앞에다 진수성찬, 살아생전 좋아하던 음식을 상이 부러지라 차려보세요. 반응이 있나? 아리따운 여인이 향수를 뿌리고 지나간다고 죽은 사람이 일어납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그게 죽음입니다. 반응이 없다! 그게 죽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성경 로마서 6장 2절에 바울이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지 않습니까?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전에 그렇게 좋던 그것들이 예수 믿고 은혜를 깨닫고 보니까 이제 시큰둥 한 겁니다. 하지 말아야지, 하지 말아야지, 여전히 너무 좋은데 억지로 참고 안 하는 게 아니라 은혜의 감격과 기쁨을 알고 그것이 사모가 되니 점점 그 전에 나에게 만족을 주고 내가 그렇게 쫓았던 것들이 이제 별로 큰 의미가 없고 유혹이 되지 않는 겁니다.

저 보고 한천 불 줄 테니 night club 가서 밤새 춤추고 술 마시고 놀아라! 그래 보세요. 제가 가나? 아유,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요. 제가 목사라서 가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싫어서 돈 줘도 안 갑니다.

기독교를 오해하시는 분들이 꼭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면 하고 싶은 거 다 참아야 하고, 자유도 없어진다. 그런데 진짜 그런가요? 아니잖아요.

세상의 유혹은 정말 달콤하고 재미있고 멋있다?교회는 정말 따분하고 재미없다? 정말 그런가요? 저는 아닌데요. 저는 그 반대인데요. 저만 그런가요?

이제 위로부터 내려온 새로운 생명이 덧입혀지면서 점점 하나님의 것들에 반응하기 시작하고 점점 전에 좋아하던 세상 것들이 재미없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물론 하루아침에는 아니더라도 점차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강제가 아니라니까요. 강제면 뭐다? 그러면 율법주의가 되기 쉽지요. 제대로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면, 점점 영적인 것들, 하나님의 것들에 더 관심이 가고 그쪽의 일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에는 참 의아한 일이 하나 벌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분명 살아 호흡하고 있는데 죽어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21장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후에” 그 후는 어떤 일 후를 말하는 건가요? 20장에 기록된 일 후 이겠지요. 20장은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하시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 또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었을 때 한 번 더 나타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 후에, 그러니까 부활하셔서 벌써 두 차례 제자들에게 보인 후에 그 말입니다. 

다시 21장 1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그렇지요?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그리고 14절 내려가 보세요.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예수께서 죽었다 살아나셨습니다.엄청난 일입니다. 상당히 놀랄 만한 일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주님 부활한 주님을 세 번째로 뵈었습니다.

자, 그런데 3절을 보세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지금 시몬 베드로는 모든 제자의 대표로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니까 같이 있던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 아들들 야곱, 요한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었는데 (2절)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고요? 3절 보세요.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무슨 질문이냐면, 여러분. 이 사람들이 지금 살아있습니까? 아니면 이들이 다 죽은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지금 다 죽은,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왜요? 반응이 없잖아요! 어떻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반응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부활절 때마다 이게 참 궁금합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나서 바로 그 후에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배를 타냐고요?

나사로가 죽었다가 산 것도 보았고, 여러 신비의 체험을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했기에 좀 무뎌졌다? 그것도 뭐,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부활이 기적이지요. 그런데 그 기적 자체 때문에 제자들이 막 180도 변했던가요? 그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이제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러 순교를 다짐하며 나가던가요?

부활절 날 이상하게 부활의 기적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같이 들릴까 봐 겁이 납니다만 네, 부활의 기적은 중요하지요. 그 부활의 역사성, 사실성, 너무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어느 때건 기적, 신비 그 자체로 사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죽었다 살았다는 그 사실만이 사람이 변하는 것의 근거가 된다면, 그러면 나사로도 죽었다 살았는데요? 바울도 창가에 걸터앉아서 설교 듣다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는 청년을 다시 살리지 않았습니까? 설교 들으실 때 절대 높은 창가에 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큰일이 나는 수가 있습니다.

구약 때는 엘리야가 한 과부의 아들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죽었다 산 기적은 성경에도 몇 번 있습니다. 그건 부활 아닌가요? 그것도 일종의 부활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 부활한 날은 왜 부활절로 지키지 않나요? 죽었다 다시 살았다는 그 기적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이 동기냐? 무슨 의미냐? 누가 죽었다 살았냐?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기적을 목격한다고 사람이 다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부활절을 즈음해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fact였는가를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네, 다시 말씀드리지요. 그거 중요하지요. 주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fact를 밝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이상을 가지 못하면 기독교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그래서? 그게 사실인데 어떻게 하라고? 이 문제가 오히려 더 큰 문제고, 답해주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헬라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는 진리는 항상 fact/사실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적 개념에 있어서 진리 truth는 사실, fact를 포함한 그 이상입니다. 

*초라하게 차려입은 어머니와 꼬마가 중국 식당에 들어옵니다. 짜장면 하나만 주세요, 엄마가 주문합니다. 

아이가 묻습니다. 엄마는 안 먹어요? 어, 엄마는 조금 전에 뭘 좀 먹었더니, 배가 안 고파.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짜장면 두 개 살 돈이 없어서 아이 먹이려고 어머니는 배가 안 고프다고 하시거나 짜장면이 싫다고 하신 것은 fact일까요? truth일까요? 아님, 뭐로 봐도 거짓말입니까? 아니지요, fact와는 거리가 있어도 이건 truth입니다. 히브리적 사고는 이렇게 truth claim을 합니다. 

*2차 대전 때 나치의 눈을 피해 유대인을 다락방에 숨겨줍니다. 나치가 쳐들어와서 유대인 숨겨주고 있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합니다. 

이게 거짓말일까요? 아니면 truth일까요? 우리를 사람 답게 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 사랑이 근거가 된 행위는 truth입니다. 물론 그것을 가리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적 사고는 지식보다 지혜를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적 사고에서 truth/진리는 단순한 fact가 아니라 person,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면? 부활을 둘러싼 fact도, 역사적 사실성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거 부정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과 관련한 진리, truth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는 무엇이냐?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것, 사망 권세를 없이하신 이 놀라운 부활의 사건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과 은혜가 동기요 원인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목격하고도 여전히 반응하지 않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는, 죽어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우리 주님 부활하시고 그냥 바로 하늘로 승천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일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부활이 그들에게도 능력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죽었던 제자들도 부활하게 하셨던 겁니다.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세워주십니다.

오늘 이 본문 이후에 나오는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 내용 잘 아시지요? 너 나, 사랑하지? 그럼, 사랑하면, 그게 확실하다면, 물론 넘어질 때도 있겠지. 안다, 내가 다 안다. 그래도 내가 다 용서하마. 그런데 여전히 나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여다오. 내 양을 쳐다오.

새 사명을 허락 받습니다. 여러분, 이게 참된 부활입니다. 이게 베드로가 참으로 부활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다시 분명히 보세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만으로는 베드로가, 제자들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게 자신들이 예수님을 부인한 죄책감 때문이던, 아니면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달아 너무 황송하고 겸손해서이던, 분명히 이 사람들의 지금 이 모습은 좌절의 모습이고, 죽음의 모습입니다.

네, 물론 이런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제자들이 다 십자가를 저버리고 도망하게 그냥 내버려 두셨던 이유는, 그렇게 주님을 부인한 자신들의 자아에 대해 철저히 죽게끔 하시려고 그랬던 겁니다. 

그래서 그 죽음은 사실은 좋은 죽음입니다. 긍정적 죽음입니다. 그런 자아에 대한 죽음이 있어야, 그래서 예수님 좌편에, 우편에 앉아 세상에서 한 자리씩 하려던 그런 욕망과 야망이 사라져야 참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그런 제자들이 될 수 있으니까요!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따르고,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 버려질 테니까요.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베드로는 자신은 죽을지 언정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진정을 베드로는 확신했던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근거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배신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인할지라도 근본적인 믿음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부인하지 않도록 기도하면 되실 텐데 왜 부인하도록 허락하시고서는 다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까?

다시 강조해드립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의 인간적인 열심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용감하고, 얼마나 자신 있게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에 다짐하였습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결코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믿는다는 것이 결코 사람의 일이 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심과 마음은 여러분, 조석지변도 아니라 순간순간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열심과 자존심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은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고서는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 죽어 있어서, 아주 철저히 죽어서 아무 반응도 하고 있지 않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다시 살린,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활시키신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0장에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21장에는 베드로의 부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처음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던 그곳에서 그물을 던지라 명하십니다. 우리는 전에도 이런 적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도 예수님께서 그물을 던지라 해서 고기가 많이 잡히고 그것을 보고 베드로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었습니다. (눅 5:8)

그 상황을 다시 재현하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과거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9절에 보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7~18절을 보시겠습니다. 새번역입니다. 17   그 때에 문지기 하녀가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18   날이 추워서, 종들과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베드로가 숯불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바로 그 부인의 순간을 회상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숯불 앞에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질문 하십니다.

너 나 사랑하냐 세 번 물으셔서, 세 번 나는 예수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긍정적인 대답으로 없었던 것으로 해주시면서 그 마음을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과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인지, 사명과 소명에 관한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도, 무덤을 박차고 나오신 부활도, 부활 후에 세 번씩이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사명 주심도, 다 그 동기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았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야, 대단해요! 엄청나네요!그러고는 어쩌라고요? 죽었던 사람이 산 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요?

십자가에서 죄 사하심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바로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하면, 이것이 깨달아지고, 연결이 되지 않으면 부활의 기적이 믿기지도 않겠지만 혹 믿어진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능력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녹아지셔야 됩니다.

우리 주님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왜요? 나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입니다. 죽어 있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죄가 사해졌고 그가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없이하셨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승환이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도 부활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랑에 이제 반응하셔야 하는 겁니다. 이제 나가셔서 산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명 없이 사시는 인생이시면 이제 사명을 받으셔야 합니다. 받은 사명에 충성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에 그렇습니다. 

19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주님, 따르겠습니다. 주님,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아멘, 아멘.

spot_img

최신 뉴스

인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