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꿈_이사야 11장 1-9절
우리는교회 조광준 목사
이사야가 하나님께 부름 받던 시기는 웃시야 왕이 죽던 때입니다. 웃시야 왕은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다.”라는 이름답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역대하 26장 4-5절 4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5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런데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으나 자신의 강함에 빠져 교만하여진 그 때 그에게 나병이 생기고 별궁에서 병을 가지고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큰 기대를 품고 있던 왕이 죽던 그 때 이사야는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본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이사야는 사명자로 부름 받습니다. 이사야 6장 8절입니다. 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후에 세상이 달라졌으면 좋았겠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말한 상황에서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 있었으며 여전히 국제 정세는 어렵기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그에게 주어진 때는 아하스가 왕일 당시였습니다. 아하스 왕 당시의 현실은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일어나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함께 맞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워낙 강하다보니 더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맞설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아하스가 그 청을 반대하죠. 그러자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남 유다를 쳐들어온 것입니다. 어지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 아하스가 어떻게 합니까? 그는 그와 그의 나라의 구원자로 앗수르 제국을 선택합니다.
열왕기하 16장 7절입니다. 7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아하스는 그렇게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보다 강한 힘을 섬기기로 결정합니다. 이렇듯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왕을 비롯하여 세상이 썩을 대로 썩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사야 1장 23절 23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왕부터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을 살다보니 아무도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몇몇 엘리트들을 위한 세상 약한 자들을 착취해도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세상, 가난한 사람들을 핍박하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복이 되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오늘 이사야에게 이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입니다.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누구를 뜻하는지 우리는 다 압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메시아가 오시는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사야 11장 6-9절입니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런데 여러분 이게 믿어지십니까? 말이 됩니까?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 이사야는 어땠을까요? 과연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셨을 때 이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사야는 믿을 수 있었을까요? 사실 누가 이 말을 믿는다고 쉽게 말하겠습니까? 더군다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지옥과 같은 현실인데요. “좀 적당해야 전하죠. 하나님 좀 이해할만한 이 상황에서 납득할 수 있는 그런 얘기 해주시면 안 됩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사야는 그 말씀을 외쳐 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꿈이라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질 일 아닙니까? 이사야는 그래서 이 말씀을 아무도 믿지 않는 세상 속에서 외쳤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는 그날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삶을 바쳤습니다.
왜요?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현실을 뛰어 넘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가 오는 그날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약속이라 믿고 그의 삶을 건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교회가 언제 시작 되었습니까? 주의 성령이 임한 그 때 교회가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교회라 부른다면 이사야처럼 주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이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오시는 그날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정말 간절히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그분이 오시는지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다리는가 그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기다림’을 안고 살아가는 삶의 내용은 하늘과 땅처럼 달라질 겁니다. 여러분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가라하셨고 성령을 보내 주셨고 너희들이 내가 하는 일보다 큰일을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그 때 우리 눈앞에 보이는 문제가 전부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일에 하나님께서 꿈꾸셨던 세상을 이루는데 동참하는 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이 땅에 오셨건만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여러분은 믿으시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예수께서 이루시겠다는 세상인데 왜 우리는 꿈꾸지 않습니까?
표범이 염소를 잡아먹고 사자는 송아지를 잡아먹으며 곰이 암소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한 세상입니다. 독사 굴에 손을 넣으면 물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본성대로 사는 것이니까요? 당연히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하는 거지. 그냥 내 본성이 그렇게 시키니까 거기에 충실하며 사는 거지.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나 다 그렇게 하니 나도 그렇게 해도 상관없어.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그 본성을 뛰어 넘는 세상을 만드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강하다고 하여 약자를 함부로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는 세상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도가 다스리는 세상을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맡기신 소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사는 세상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말합니다. 우리는 동물들이 먹이를 앞에 두고 참지 못하듯이 진노에 이끌려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이사야 11장 2-3절 2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가 아니라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에 방해만 되었던 우리를 결코 군대를 일으켜 파멸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본성을 뛰어너믄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과 하나님이 꿈꾸는 세상이 일치하나요? 나만 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지 않습니까? 현실을 모른 척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암울한 현실을 모른 척 하고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세상을 보며 하나님의 꿈을 우리 삶에 이식할 때 예수께서 이 땅에 이루고자 하셨던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 있던 하나님의 그 꿈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세상엔 그런 미련해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꿈 하면 생각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저는 꿈 하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1963년 8월 워싱턴에서 그분이 한 연설의 일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솟아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에,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는 저 미시시피 주 마저도,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현실로 받아 들여 그 목숨을 바쳤던 한 사람의 이 위대한 연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 현실의 힘과 권력에 짓눌려 패배감에 떨고 억울함으로 눈물 흘리던 사람들을 찾아와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렇다면 무엇을 하며 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성령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본성을 버리고 평화를 선택하는 길 약한 자를 돌보는 길 슬퍼하는 자들을 끌어안고 함께 울어주는 길 일어나지 못하고 좌절하여 쓰러진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일어날 때까지 함께 머물며 기다려 주는 길 어두운 곳에 가서 빛이 되는 길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쁨 되는 하나님의 꿈 말입니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꿈을 좇는 다는 것은 좀 바보 같은 일 아닐까요? 모두가 다 우리를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그 꿈을 좇아 살아가야합니다.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김관성 목사는 ‘본질이 이긴다.’라는 책에서 독일의 시인 라인홀트 슈나이더의 “주의 이름으로 시대정신에 저항하는 자들은 그 정신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항의 대가는 가혹할 것입니다. 처절한 응징이 우리의 삶에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도 시대정신의 포로가 되는 길을 포기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높이 드는 사역자와 신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길이 힘들다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눈물과 한숨’을 사용하십시오. 그런 다음 또다시 걸어가십시오. 그 길 위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대의 영광스러운 바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바보의 자리로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을 노래하며 또 걸어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