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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정결하게 하는 능력(마가복음 1 장 40 ~ 45절)_사스카툰비전한인교회 이형원 목사

정결하게 하는 능력(마가복음 1 장 40 ~ 45절)

사스카툰비전한인교회 이형원 목사

고독사!! 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고독사는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죽는 것으로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살아가는데 그러다가 자살 혹은 병사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일정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한국에서 2022년에 발표한 고독사 실태조사를 보면 2021년 고독사로 혼자 죽어간 사람이 3300여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2800여명이 5,60대 남성으로 전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30대의 고독사 비중도 8.4%로 매년 200여명 이상의 청년이 홀로 세상을 떠났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사실 고독사에서 중요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죽음이라는 키워드 보다 고독이라는 키워드입니다. 핵가족화, 일인가구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고독, 외로움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 같습니다. 특별히 코로나를 겪으면서 이런 사회적 고립이 더 심화 되었고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더 증가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영국 같은 경우 900만명 이상이 외로움을 느끼고 그 중 600만명은 그 외로움을 숨긴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고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한 후 외로움을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2018년도에 외로움 문제를 담당하는 고독부장관이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봉사활동이 있었는데 말 벗 서비스가 그것이었습니다. 혼자 지내시는 노인분들을 연결해 주고 한 주에 1차례 이상 통화를 하는 것이 봉사활동의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한 분 할머니와 연결 되서 매주 통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 밑에서 컸기 때문에 할머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열심히 봉사활동에 참여했고 주말에는 한 번 찾아뵐 생각이 있어서 할머니에게 한 번 찾아뵙겠다고 한 적도 있는데 이분이 분명히 경기도라고 주소지가 되어있었는데 전라도 광주에 계시다고 해서 실제로 찾아뵙지는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민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말이 많아진다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현상도 이민을 와서 겪는 어려움 가운데 외로움이 자리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힘들어 합니다. 외로움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홀로되어 쓸쓸한 마음”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옆에 함께 할 사람이 없어서 혹은 부족해서 쓸쓸하다고 느끼는 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이죠.

오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요 본문을 보면 정말 너무너무 외로울 수 밖에 없는 한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40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 한 명이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나병환자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이 꼭 지금의 한센병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쉽게 치료되지 않았던 모든 피부병을 그렇게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사회적인 단절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레위기 13장 45~4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이들은 자신이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습니다. 또 혹시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윗입술을 손으로 가리고 나는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또한 이들에게는 전염에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혼자 겪리된채 진영 밖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우리는 코로나를 겪으면서 격리에 대한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느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 가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끊어지고 혼자 혹은 가족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시기를 모두가 겪었습니다. 거기서 많은 분들이 외로움과 고독함, 우울함과 무력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또 무엇보다 우리를 답답하게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코로나가 언제 끝날 것인가? 에 있었던 것 아닙니까?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조금 나아지나 싶다가도  다시 늘어나고 하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통가운데 살았을 것입니다. 매일 자신의 피부가 섞어가는 것을 봐야했고 사회적으로 부정한 자로 취급 당하면서 손가락질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격리된 채 살아가기에 사람을 만날 기회도 없었을 뿐 아니라 혹시 어쩌다 사람들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입을 가린채 부정하다고 외쳐야 하는 자괴감을 느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개인적인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마가복음의 최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 나병환자가 찾아와서 예수님 앞에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신의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고백이 참 겸손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는 기록은 그가 겸손하게 나아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고백으로 그의 겸손함을 다시 한 번 드러냅니다. 이 나병환자는 정말 어렵게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대단한 결심을 하고 나온 것입니다.

사실 나병 환자가 사람들 앞에 나아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고 때문에 사람들이 율법을 어기고 사람들 앞에 나와서 말을 붙이는 이 나병환자에게 돌을 던지고 죽일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지나가는 길에 예수님이 보여서 그저 혹시 모르니까 한 번 가보기나 하자 뭐 이런 쉬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 하니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님 앞에 나아가자!! 하는 사생결단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결단하고 나왔으면 뭐라고 해야 합니까? 예수님 저 목숨 걸고 나왔으니까 제발 제 병을 고쳐주십시오. 뭐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뭐라고 고백합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제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병을 고치고 안고치고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고백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만약 나를 고쳐주시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나음을 입을 것입니다. 겸손한 표현입니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그러한 고백입니다.

이런 나병환자를 보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4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환자의 모든 상황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가 당하고 있는 육체적인 고난, 사회적 격리에 따른 외로움, 사랑하는 가족, 친지, 친구들을 만날 수 없는 아픔등을 모두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이야기할 때 불쌍히 여기다는 말은 사본에 따라 2가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스플랑크니조마이’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인간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사랑’ 혹은 ‘애타는 마음’ 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이 말은 찢어질 듯한 마음을 뜻합니다.

한글 번역이 그저 불쌍히 여기셨다고 이야기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그 느낌을 잘 살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쓰는 표현 중에 애간장이 탄다, 혹은 억장이 무너진다 정도로 번역하면 조금 원어와 더 가까운 번역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불쌍하다 하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애간장이 탈 정도로, 그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그에 대한 불타는 동정심을 갖고 계셨던 겁니다.

사실 가장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 불쌍히 여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불쌍함이었던 것 같아요. 저의 아버지를 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꼈고 제 형을 보면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 아내를 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많이 있어요. 사실 부부간에 서로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그 가정은 절대 깨질 일이 없을 거에요. 

이찬수 목사님은 목회자에 대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교인들이 담임목사님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목회자는 성공한 목회자라고요.

그 말이 참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병든 교회는 서로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향해 딱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반면에 목회자는 성도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평불만을 이야기 하고 다닙니다.

반면에 건강한 교회는 성도들이 목회자를 불쌍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어떻게든 감당하려고 이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목회에 전념하는 목사님을 보면서 한 편으로 존경심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거죠. 또 목사님도 이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든데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그들을 존경하고 또 한편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거에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길 때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공동체,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보면서 이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마음은 단순한 동정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애간장이 타는 긍휼의 마음이 예수님을 지배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곧 분노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조금 전 번역본에 따라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된다고 말씀드렸고 그 중 하나가 ‘스플랑크니조마이’ 라는 말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다른 하나는 ‘오르기스데이스’입니다. 이 말은 ‘노하다’ 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분노였다는거에요.

무엇을 향한 분노였을까요? 이 불쌍한 영혼을 사회적으로 매도했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분노 아니었을까요? 이들을 부정한 자 취급하면서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았던 당시 사회에 대한 분노 아니었을까요? 이 영혼을 보면서도 불쌍히 여기지 못하던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믿지 않는 영혼들을 바라볼 때 우리가 느껴야 하는 감정이 바로 이와 같은 감정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에 진리를 모른채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 살아가보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해 영원한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순간의 유익과 쾌락만을 쫓아 살아가는 영혼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도는 바로 이런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영혼을 고쳐주실 때 그 어떤 사심도 없으셨습니다. 제가 만약 어떤 병자를 기도를 통해 고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안에 아무런 사심이 개입되지 않는다고 자신 할 수 있을까요? 마음 한 구석에서 이 사건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지 않겠어요? 이 일을 통해 내가 능력 있는 목회자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지 않겠어요?

예수님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로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해서 이 병자를 고쳐주신 것 같아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병자를 고친 후 일어난 일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병을 고쳐줬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43,44절 말씀입니다.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예수님은 아무한테도 이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엄히 경고하셨다는 말은 가볍게 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신신당부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병자는 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예수님은 오히려 이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셨습니다.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한 일을 많이 퍼트렸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드러내 놓고 다시지 못하고 한적한 곳으로만 다니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드러낼 마음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앞서 살펴봤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알아보는 귀신들에게도 항상 예수님의 메시야임을 말하지 못하도록 그 입을 막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드는 자리를 피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역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제약을 받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위험성이 있음을 모르고 계셨을까요? 저는 알고 계셨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나병환자에게 그렇게 엄중하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왜요? 자신의 인기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최고의 사랑의 마음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를 외면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때때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건강의 문제, 관계의 문제, 물질의 문제, 자녀의 문제, 앞서 이야기한 외로움의 문제도 우리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그 어떤 사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나의 어려움을 보시고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그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또 겸손함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 그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갖길 원합니다. 주변에 믿지 않는 영혼들을 향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혼들을 향해, 불쌍한 영혼들을 향해 예수님과 같이 아무런 사심 없이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은 곧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보여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41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손을 내밀어 그 환자에게 대시면서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말씀만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를 고칠 때 굳이 몸에 손을 대십니다.

저는 이 대목이 너무너무 은혜가 됩니다. 오늘 설교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이 환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에는 2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병의 전염입니다. 애초에 나병환자들을 격리시키고 혹시나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이 부정하다는 것을 알려야 했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전염성 때문 아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질환의 전염성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두 번째 위험은 부정함 아닙니까? 이 환자와 접촉한 사람도 역시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환자의 몸에 손을 대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질병과 함께 종교적 고립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율법을 의식하지 않고 그 병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왜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로만 하지 않고 손을 대시며 그의 병을 치료하신 예수님의 행동은 발병한 이후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을 느끼지 못했을 그 병자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42절의 말씀입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 진지라”

예수님과 나병환자의 접촉으로 전염병이 예수님께 전달되지 않고 예수님의 깨끗함이 환자에게 전가됩니다. 예수님과 나병환자의 접촉으로 예수님께서 부정해 지시지 않고 예수님의 정결함이 나병환자에게 전해집니다.

이게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더러운 곳에 손을 대서 내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곳에 손을 댐으로 그 더러운 곳이 깨끗하게 되는 일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살아감으로 세상의 오염되어 죄로 물드는 삶이 아니라 그 세상과의 접촉을 통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최영기 목사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간증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미국에 와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과학을 전공한 분이었습니다.

학위를 받고 이제 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 자기보다 먼저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한국 분들이 자신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줬다고 합니다. 조언한다고 하던 말이 상사들이 일을 많이 시키면서 내가 한 일들도 자기의 성과로 가져가는 일이 많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 자신과 함께 일하는 테크니션들을 잘 부리는 방법 같은 것을 알려줬다고 해요.

그런데 그 분들이 하는 조언들이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그냥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직장에서도 성경의 원칙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직장상사에게는 복종하고 부하직원들에게는 그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합니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경험담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의 방법을 강요하죠. 바보처럼 보이면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니까 영악하게 자기 것은 철저하게 챙기고 때로는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고요. 또 필요하다면 적당한 거짓도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이런 세상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도태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 이야기에 오염되는 삶이 아니라 그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맞지 않는 이야기는 배척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될 때 오히려 세상은 우리로 인해서 깨끗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터치를 통해 이 병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셨던 그 사랑의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께 온전히 전달되어졌고 하나님과 일치된 예수님은 그 마음을 가지고 그 환자를 치료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이와 같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갖는 영성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내 마음에도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 내가 부정해 지는 삶이 아니라 부정한 사람들을 정결하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빛과 소금’ 이라고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마음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넉넉히 감당해 나갈 수 있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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