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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주님의 흔적(야고보서 2장 14~26절)

주님의 흔적(야고보서 2장 14~26절)

몽턴소망교회 이상천 목사

사도 바울은 곳곳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는 그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9장 30절을 보십시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었지만 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의는 믿음에서 난 의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인간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지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은혜이고 선물이라는 겁니다. 만약 행위로 얻는 구원이라고 한다면 그건 자랑이고 상급이지 은혜도, 선물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곳곳에서 행함을 강조합니다. 먼저 본문의 14절 보십시오.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7절도 보시기 바랍니다.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절도 보십시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4절입니다.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절을 보십시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니까 본문 곳곳에서 ‘행함’을 얼마나 많이 강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다 보니 혹 두 성경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분명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성경이 모두 진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장로교 성도들은 더더욱 불편합니다. “구원을 얻는 데에도 무슨 행함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알고 있는데 왜 야고보는 이렇게 행함을 강조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야고보는 율법주의자와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하는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없습니다. 모순되는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지금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상반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은 오히려 상호보완적입니다. 어떻게 이 둘이 상호보완적인 것일까요?

율법주의자들은 행함이라고 하는 것을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야고보는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런 차원에서 행함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증거로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걸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겁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 영생이라고 하는 나무가 있다 칩시다. 믿음은 구원이라고 하는 나무의 뿌리입니다. 행함은 구원이라고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행함은 한 나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뿌리는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에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짜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검증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는 것으로는 그게 과연 어떤 나무인지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열매를 맺는 걸 보면 그 나무가 사과나무인지, 배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매를 보면,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는 그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저는 농사에 대해 잘 모릅니다. 별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감나무인지 밤나무인지 배나무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처럼 나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나무에 대한 강조점이 다를 뿐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뿌리인 ‘믿음’에 대해 강조한 것이고, 야고보는 구원의 열매인 ‘행함’에 대해 강조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행함의 열매 없다면 그건 죽은 믿음이고 가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주신 목적이 바로 이 열매에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 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는 바로 이 열매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주장이나 야고보의 주장이 서로 상반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 다 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과 행함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이라는 열매를 만들어내는 근거이고, 행함은 믿음이 진짜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가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만 그런 게 아닙니다. 믿음의 세계에도 가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제는 가짜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짜인 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거짓 믿음으로 인하여 교회가 얼마나 오염되고 병약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러한 거짓 믿음을 배격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라는 열매는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진짜와 가짜를 판가름 하는 행함이라는 열매를 저는 ‘삶의 흔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삶의 흔적’을 남기는지를 유심히 보라는 겁니다. ‘삶의 흔적’은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삶의 흔적’은 딱 둘로 분류가 됩니다. ‘주님의 흔적’을 남기느냐 ‘내 흔적’을 남기느냐 하는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행위라고 하는 흔적은 모두가 ‘내 흔적’입니다. 하지만 진짜는 ‘주님의 흔적’만 남깁니다. 그 사람의 흔적을 보면 주님 외에는 보이는 게 없습니다.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하지만 가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늬만 ‘주님의 흔적’이지, 포장만 ‘주님의 흔적’이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다 ‘내 흔적’입니다. ‘주님의 흔적’은 안 보이고 ‘내 흔적’만 보이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했고, 내가 얼마나 헌신했고, 내가 얼마나 충성했는지, 늘 ‘내’가 중심이 됩니다. 내가 드러나고, 내가 칭찬받기를 원하고, 내가 인정받기를 기대합니다.

곳곳에 ‘내 흔적’을 남기는 자, 다 가짜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의 사역을 해도, 아무리 훌륭한 말씀을 전해도,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아무리 충성되이 헌신한다 할지라도 ‘내 흔적’만이 거기에 나타난다면 단연코 말씀드리건대 ‘가짜’입니다.

냄새도 다릅니다.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삶의 흔적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가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삶의 흔적에서는 ‘나의 악취’만 가득합니다. 그러니까 이 ‘주님의 흔적’이 바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고, 진짜와 가짜를 분별해주는 열매인 겁니다.

오래 전 한 목사님이 시골 깡촌에서 목회를 할 때였습니다. 교인도 몇 되지 않는 시골교회여서 사례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그렇기 어렵게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가난해서 도무지 목회를 할 방도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도시로 사역지를 구해서 거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시무하던 교회에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 가정은 상당한 부자였습니다. 큰 기와집에서 제법 잘 살았습니다.  다른 한 가정은 과부였는데, 그 부잣집 담벼락에다 조그마한 무허가 건물 하나 지어놓고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동네 지주였고, 이 과부는 닭을 네댓 마리 키우는 게 전부였습니다.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떠나시는 목사님을 전송한다고 부자 집사님이 집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러는 겁니다. 잘 가시라고, 어디 가시든 끼니도 거르지 말고 잘 드시라고, 고기도 좀 드시고 건강하시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내심 좀 기대를 했답니다. “집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거 보니까 전별금이라도 좀 주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봉투 하나 안 내놓고 그냥 인사만 하고 가버리더랍니다. 속이 많이 상했답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죽을 고생하면서 목회를 하다가 가는데, 그러면 돈 한 푼이라도 좀 쥐어줘서 보내줘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상당히 섭섭하더랍니다. “죽으면 어차피 다 가져가지도 못할 돈을 쌓아놓고도 어찌 그리 욕심을 부리노?” 그러면서 정류장으로 나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떠납니다.

막 버스가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남루한 사람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버스를 세우더랍니다. 보니까 부잣집 담벼락에서 사는 그 가난한 과부더래요.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게 인사하고는 이만한 시멘트 부대로 둘둘 말은 걸 하나 던져주고는 도망치듯 가더랍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궁금한 겁니다. 돈도 없는 과부가 무언가를 줬는데, 무게도 별로 나가지 않는 것이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알지를 못하겠는 겁니다. 그래서 조심스레 시멘트 종이를 풀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계란 세 개씩 두 꾸러미가 들어있는 겁니다. 아마도 과부가 한 이틀 정도 정성껏 모은 계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봉투에 이렇게 글이 써져 있는 겁니다.  한 봉투에는 “산 다갈”, 다른 봉투에는 “안 산 다갈” 이렇게 써놓은 겁니다. 

순간 목사님이 좀 헷갈렸답니다. ‘산 다갈’은 뭐고 ‘안 산 다갈’은 뭘까? 그러다가 이렇게 이해를 했답니다. “산 다갈”은 살아있는 닭 알이고 “안 산 다갈”은 죽어있는 닭 알, 즉 삶은 계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배도 고프던 차라 삶을 계란을 하나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안 산 다갈”하나를 무르팍에 대고 탁 깨었습니다. 아, 그런데 “퍽”하면서 계란이 깨어지는데 보니까 생 계란인 것입니다. 그래서 단벌신사 바지를 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산 다갈”은 삶은 계란, “안 산 다갈”은 안 삶은 계란이었던 겁니다.

이 목사님은 버린 옷을 붙들고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하염없이 울었답니다. 그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 과부의 계란이 자기 평생의 목회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는 겁니다. 이 과부가 남긴 흔적, 이런 게 바로 ‘주님의 흔적’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제나 자매에게 잘 먹으라 하고, 따뜻하게 자라고 말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누구는 잘 먹고 싶지 않겠습니까? 누군들 따뜻하게 자고 싶지 않겠습니까? 돈이 없으니 그렇게 못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말만 하지 말고 필요한 것을 조금이라도 공급해주라는 겁니다. 그렇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도록 액션을 취하는 것, 그게 바로 ‘주님의 흔적’을 남기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흔적’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입증된 것입니다. 창녀 라합이 정탐꾼들을 접대하고 그들을 보살펴준 것도 바로 ‘주님의 흔적’입니다. 이것은 라합의 믿음이 참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던 겁니다.

성도 여러분, 귀신은 믿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귀신도 믿음이 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떨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귀신이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습니까? 못 얻습니다. 왜요? 귀신에게는 ‘주님의 흔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악취 나는 ‘자기 흔적’만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 믿음이 가짜인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 없는 겁니다. 

나는 주님의 흔적을 남기며 살고 있는가? 이 점에 있어서 저도 참으로 두렵습니다. 제 삶에서 ‘주님의 냄새’만 나야 하는데, 혹시라도 ‘저의 냄새’가 날까 두렵습니다.‘주님의 흔적’은 없고 ‘제 흔적’만 남을까 두려운 겁니다. 수고는 내가 하고 영광은 주님이 받으셔야 하는데, 수고는 주님이 하시고 영광을 제가 가로챌까 두렵습니다. 진짜의 길을 가지 않고 가짜의 길을 갈까 두렵습니다.

“아니, 그런 확신도 없이 무슨 목회를 하느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자신을 너무나 잘 압니다. 제 속에 얼마나 ‘삯꾼의 기질들’이 많이 있는지를 모릅니다.

제가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이 가짜의 기질들이 속에서 막 속에서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제 ‘삶의 흔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워버릴까 두렵습니다. 늙어 가면 늙어갈수록 제 ‘삶의 흔적’에서 주님의 향기가 더 풍성해져야 할 텐데, 만에 하나라도 저의 ‘노욕’ 때문에, 악취만 풍기는 삶이 될까 두려운 겁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주님의 흔적’을 남기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악취 나는 ‘내 흔적’을 남기며 살고 있습니까? 과연 ‘좁은 문, 좁은 길’의 흔적을 남기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넓은 문, 넓은 길’의 흔적을 남기며 살고 있습니까? 과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영광’을 드러내는 흔적을 남기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삶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기를 기대하십니까? 자신의 흔적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흔적입니까?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스펙에 의해서 결정 나는 게 아닙니다.돈에 의해 결정 나는 것도 아닙니다. 직업에 의해 결정 나는 것도 아닙니다. 소위 세상의 성공 여부로 결정 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인생의 성공 여부는, ‘삶의 흔적’으로 결정이 납니다. 이걸 염두에 두고 자식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자식들의 ‘삶의 흔적’에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도록 키워야 합니다.

자신의 냄새를 지우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그게 믿음의 부모가 가져야 할 사명이고 책임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의 흔적’을 보십니다. 아주 예리하고 정확하게 보십니다.주님은 우리의 ‘삶의 흔적’을 통해서 진짜와 가짜를 판별하고 가려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후일 주님 앞에 섰을 때, 양과 염소를 가르실 때, 알곡과 죽정이를 나누실 때,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실 때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하게 될 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흔적’을 통칭하는 말이라 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삶의 흔적’에서 주님이 보입니다. 하지만 가짜 믿음은 ‘삶의 흔적’에서 자신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삶의 흔적’으로 확인되고 증명이 됩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앞으로의 남은 인생에서 ‘주님의 흔적’만 남기며 살아가는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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