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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나는 생명의 떡이니 (요 6:35) 예수님의 자기 선포 (1)_토론토 영락교회 송민호 목사

나는 생명의 떡이니 (요 6:35) 예수님의 자기 선포 (1)

토론토 영락교회 송민호 목사

오늘부터 올해 말까지 주일이 7번 남아 있습니다. 이 기간에 주일예배를 통해 요한복음에 나오는 “I AM” 시리즈를 다루려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신성을 드러내며 자기 선포를 하시는 모습이 일곱 번 나오는 데 그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이 “I AM”의 배경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잠시 부연하자면, 이 말씀의 배경은 출애굽기 3장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발을 벗고 가까이 갔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택해서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겠다고 하셨고, 모세가 “누구십니까? 내가 가서 누가 내게 이를 시켰다고 이야기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을 하십니다. “I AM who I am”이라는 표현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내용인데, 요한복음에서만 특별히 ‘I AM’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출애굽기 3장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을 일곱 번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 “나는 생명의 떡이니 I AM Bread of Life”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대화 중에 먹고 산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꼭 먹는 일이 아닌 경우에도 먹는다는 표현을 합니다. 예를 들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지’ 혹은 ‘아, 먹고 살기 힘들다’ 같은 표현 말입니다. 이런 표현 안에는 일하는 것과 먹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한때 상당히 살기 어려운 시기를 지났기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던 때, 일하기 힘든 상황, 고된 삶을 내포하는 흔적일 것입니다.  

모든 생물체에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생물체와는 좀 다른 부분이 있는데 인간에게 있어 먹는다는 것이 생존을 넘어서 사회생활 social life을 위해서도 먹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모여서 즐기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결혼식이나 생일이나 각종 파티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식사입니다. 

우리도 지난주에 교회 창립 기념 주일을 맞아 우리는 전교인 식사를 했습니다. 여러 성도가 고생해서 커다란 교회 식구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섬겨주셨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또 밥도 먹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 좋은 연대감을 느끼는 데 필요한 요소입니다.

성경에는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많은 대화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먹는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날 벌판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커다란 무리를 모두 먹이셨습니다. 한적한 곳이어서 어디 가서 쉽게 음식을 사 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 온다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원대로 먹게 해 주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풍성한 식탁을 만드는 기적을 베푸시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것입니다 (요 6:11).

그래서 이 무리가 다음 날도 예수님을 찾으러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와서 다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거기서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하며 반가운 듯 예수님에게 말을 건넵니다 (요 6:25). 

영의 양식도 생각하라

예수님은 먹거리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한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음을 깨닫고 메시아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즉, 먹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 또 배불리 먹기 위해서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요 6:26). 

그러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27). 썩을 양식이라는 것은 영원한 양식이 아니라 매일매일 필요한 이 땅의 양식을 말합니다. 살기 위해 필요한 양식을 말합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밥이고, 서양 사람들에게는 빵입니다. 또 고기와 채소가 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오래 보관할 수 없고, 그때마다 요리해서 먹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썩을’이라는 말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이라는 의미입니다.  

매일 필요한 양식이긴 하지만, 우리의 배고픔과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놔두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밥은 쉬고, 빵은 상합니다. 그래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저 먹고 사는 일에만 집중할 수는 없습니다. 매일 세 끼를 먹어야 하지만, 하루 세 끼를 잘 먹었다고 해서 다음 날 안 먹어도 된다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 먹기 위해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예수님의 말씀, ‘썩을 양식을 위하여(만) 일하지 말고’의 뜻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 몸의 배고픔이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몸에 들어가는 양식도 썩고, 우리 몸도 썩기 마련입니다. 

이제는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찾아 일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데, 그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29). 이 일은 우리 영혼을 살리고, 살찌게 feeding 하는 일입니다.  

철학자 브레이즈 파스칼Blasé Pascal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어떤 피조물로도 채울 수 없는 하나님 모양의 공허함이 있는데, 이 공허함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There is a God-shaped vacumn in the heart of every man, which cannot be filled by any created thing, but by only God, the Creator, made through Jesus.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을 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온전히 모실 때, 공허한 우리 마음이 비로소 채워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마음의 공허함은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채우려 한다는 점입니다. 공허함을 물질로 채우고, 명예로 채우고, 권력으로 채우고, 성적 욕구로 채우려 합니다. 여기서 물질욕, 명예욕, 권력욕, 음욕 등이 생기고, 이런 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을 더 괴로워집니다.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허탈해집니다. 

사실 이런 욕심은 모두가 빗나간 욕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으로 채워져야 하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 모양의 공간’을 다른 것들로 채우려 하니 괴로움만 더해지는 것입니다.  

빗나간 욕심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common 것은 탐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괴로워합니다. 누가 명품 가방을 들고 있으면 나도 갖고 싶어 합니다. 누가 멋있는 자동차를 타고 있으면, 나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못하니 늘 비교가 되고 마음이 괴롭습니다. 

90을 바라보던 존 스토트 목사님이 삶의 말년에 양로원에서 쓴 책이 <제자도> Radical Discipleship입니다. 8장으로 되어있는데, 그중 ‘단순한 삶’이란 제목의 장에서 ‘우리는 좀 더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창합니다. 필수품과 사치품의 차이를 알아야 하고, 창조적인 취미와 무의미한 신분 상징들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유행의 종이 되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자도, 90쪽). 

한때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고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당대의 최고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철저한 금욕과 반문명적 생활을 하는 철학자였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 보시오.” 

이때 디오게네스가 입을 열었습니다. 

“조금만 비켜 주시오. 당신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알렉산더 대왕은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는 물질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이 그리 중요한 어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33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관에 구멍을 뚫고 두 손을 밖으로 내어 보이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람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질적 부요함이나 소유가 모두 헛되다는 진리입니다. Alexander the Great wanted his hands to dangle out of his coffin, emphasizing that material wealth and possessions are ultimately meaningless.

우리 안에 들어 있는 탐욕, 명예욕, 음욕, 등은 다 헛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라고 하셨습니다 (요 6:35).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결코 주리지 않는다’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께로 나오면 (54절에서는 더욱 심화된 표현을 쓰십니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다시는 주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해결사이십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공허했던 우리 마음이 채워집니다.  

더 이상 남이 좋은 것을 소유했다고 해서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거나 탐내지 않습니다. 더 이상 많은 것을 원하고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이 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우물가의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셨을 때, 그녀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녀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자는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4:18). 이 여인은 좀 더 나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는 공허함이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에 풍요함이 생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5번이나 결혼하고, 5번 모두 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의 마음은 공허함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영적 굶주림과 갈증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루하루를 그 생명 안에서 살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영생이 시작됩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목사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심한 영적 갈증을 느꼈던 사람입니다. 그가 일찍이 선도교에 심취되어 산중에서 도를 닦고, 한겨울에도 정한수를 떠놓고 산신령에게 새벽 3시에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도사라고 칭할 정도로 그에게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를 찾아와 그의 제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길선주가 25살 청년이었을 때, 하루는 한 아리따운 여인이 그에게 도를 배우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둘은 함께 수양을 하다가 그만 불타는 젊음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선을 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 길선주는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하며 깊은 회의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나중에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는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길선주는 예수를 믿기로 결심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6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는데, 살아있는 동안 노년에는 전국을 다니며 회중을 깨우치는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던 방지일 목사님은 길선주 목사님과 함께했던 때를 회고하며, 그분은 찬송가 ‘성령이여 강림하사’를  적어도 10번 이상 부르고 설교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처음부터 22장 끝까지 암송하는 그의 열정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부흥회 때마다 엄청난 은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온전히 모실 때, 그래서 이 세상 어떠한 것도 주님과 비교할 수 없을 때, 우리 인생의 방황이 그치고, 더 이상 욕심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물질욕, 명예욕, 권력욕, 음욕 등 빗나간 욕망을 버리십시오. 이런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욕심으로 인해 인질이 된 기분이 들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유혹하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인정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나의 삶 속에,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 임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성도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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