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부르심에_누가복음 9장57-62절
밴쿠버 새벽교회 김동희 목사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거의 모든 행위는 딱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생산이요, 하나는 소비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는 돈을 버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돈을 쓰는 것입니다. 기업들 나아가, 이 사회는 열심히 광고하고, 문화를 만들고, 욕망을 만들어서 돈을 쓰게 합니다. 그리고 그 열심히 쓰는 돈을 벌기 위해서 생산을 열심히 합니다. 생산이 많아지면 또 그것들 잘 소비할 수 있도록 나라는 돈을 더 늘리고, 돈이 더 늘어나면 소비가 더욱 늘어나고, 다시 그 돈을 벌게 위기 열심히 생산을 해냅니다. 돈을 벌고, 쓰고 하는 것들을 열심히 되풀이해서, 그 양이 많아지는 것을 우리는 경제 성장이라고 부릅니다.
생산과 소비에 완전히 젖어 든 우리는 모든 것을 돈을 버는 것과 돈을 쓰는 것에 맞추어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 내가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냐, 또 내가 얼마나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냐로 우리 자신을 평가합니다. 내 곁에 있는 이웃을 대할 때에도 이 사람이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냐, 또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냐로 판단합니다. 심지어 우리 하나님을 만날 때에도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이 얼마나 나에게 복을 주시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먼저 생각하곤 합니다. 머릿속에 가득한 경제관념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우리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들을 때에,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먼저 57절, 58절 말씀입니다.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걸어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이 사람이 왜 예수님을 이처럼 따른다고 하였을까요? 이 사람의 속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기대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나 다윗처럼 나라의 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이니, 예수님과 함께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상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삶에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 그 자체가 큰 명예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생각을 하든, 어떠한 기대를 하든, 이 사람은 그것이 자신에게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고, 자기 인생을 투자할 만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이 가혹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둥지가 있다. 그러나 나에겐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이 말은 이러한 뜻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그것은 광야의 삶, 나그네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 세상이 칭찬하는 자랑을 내려놓는 것이다. 오히려 쉴만한 집 하나 얻지 못하는 삶이요, 어느 자리한 곳에 안정적으로 살지 못하는 삶이다. 의지할 곳 없는 삶이요, 고난과 역경을 고스란히 견디고 인내해야 하는 삶이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삶이다. 네가 그러한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내가 이러한 것, 저러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할 때에는 내심 주님께서 이런저런 것으로 응답해 주시겠지, 내심 주님께서 이런저런 것으로 보상해 주실 거라는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투자한 만큼 그에 맞는 보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돈을 많이 지불하면 좋은 물건을 얻는 것처럼, 주님께 많이 드리면 그만큼 좋은 것을 얻게 되겠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면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브 앤 테이크의 방식을 뒤집으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네가 나를 따라오겠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호기롭게 주님 따라가겠다는 사람을 낙심하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59절, 60절 말씀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앞서 57, 58절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먼저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앞선 사람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욕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선택하여 강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 명령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런데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이 사람은 망설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십계명 다섯 번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1년 정도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리는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이 사람도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개의치 않으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죽은 사람들을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어라.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아버지를 기리는 일을 멈추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통념과 상식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삶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라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고, 그 어떤 일보다 시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죽은 사람의 일은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너는 생명을 드러내는 일을 하여라. 너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전하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죽은 이들을 되살리는 일이요, 주님을 따르는 일이 근본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기에, 너는 나를 따르는 일을 먼저 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떤 문제보다 중요합니다. 특별히 돈을 버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권세보다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이니, 사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계산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응답하라 말씀하십니다.
두 구절을 살펴보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은 망설이게 하시고, 당신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은 따르라 강권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 목적을 포기하게 하시고, 예수님보다 앞서 다른 것을 먼저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선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설을 우리는 깊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목적에 있어서나 방법에 있어서나 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이제 끝으로 61절과 62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마지막 세 번째 상황에서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겠으니 다만 가족과 먼저 작별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이처럼 말한 데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20절에서 21절 말씀에 보면 엘리사가 그의 선생님이었던 엘리야를 따르기 시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19장
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 직전에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허락을 구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엘리사의 요청을 허락해 주었고, 엘리사는 부모님께 고기를 대접하고 난 후에 엘리야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사람은 이와 같은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께 부탁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인지상정으로 허락해 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단호하게 잘라 거절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다. 쟁기를 가지로 밭을 갈 때에는 오직 밭에 시선을 집중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고 곧게 쟁기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쟁기질을 비유로 들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기로 하였으면 좌고우면하지 말고 다른 것에 한눈팔지 말고 나에게 집중하여라. 그러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면 우리는 이제 주님께 우리의 집중을 드려야 합니다. 세상 근심과 염려, 두려움과 불안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세상의 유혹과 자랑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분주함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께 집중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집중의 모습은 바로 다름 아닌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자신의 온 마음과 뜻을 집중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그 순간까지 다른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였습니다. 그 결과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 시간,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가 우리의 기존 생각의 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마치 소비하듯이, 마치 투자하듯이 내가 무언가를 드리면 무언가를 받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거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둘째로는 우리 주님이 부르실 때에 우리가 이제껏 인생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돈, 명예, 성공, 권세, 인정, 인간관계, 그 모든 것들에 앞서 예수님의 부르심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우리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결단했다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나서도 이것 먼저 하고, 저것 먼저 하고 이러면서 정작 주님과의 만남을 뒤로하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이처럼 계산하지 않고,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정반대의 결단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단만으로도 우리는 절벽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의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결단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길을 믿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순종하며, 끝까지 십자가의 길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기꺼이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주님을 따르는 길, 생명의 길,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부르심에 나는 아니지요 하지 마시고, 즉각적으로, 온전히, 그리고 순전하게 응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