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단상] 보혜사 성령, 우리 안에 오시다! 요 16:4-15_키치너워터루 드림교회 신동희 목사

보혜사 성령, 우리 안에 오시다! 요 16:4-15

키치너워터루 드림교회 신동희 목사

한 주간의 삶도 승리하셨는지요? 한 분 한 분, 예배 가운데 부어주시는 성령의 큰 역사로 은혜의 풍성한 시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론 : 떠나심의 유익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 2장에서 읽으신 대로 오순절에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중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내려온 일을 기념합니다. 또한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탄생일”로도 불리며, 성령의 임재를 통해 제자들이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게 되는 시작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고별 설교 중 한 부분으로 예수님이 떠나신 이후 성령께서 오셔서 하실 사역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재가 곧 성령의 임재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이후 성령님이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시기에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이 유익하다고 하신 것인지 말씀 속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1. 성령은 예수님이 보내신 보혜사입니다(v.7)

오늘 성경 본문에는 쉽지 않은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바로 ‘보혜사’가 그것입니다. 보혜사(保惠師-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스승)는 헬라어(그리스어) παράκλητος(paraklētos) 파라클레토스의 한자 번역입니다. 물론 요 15:26에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왜 보혜사라고 할까요? 한국어를 사용하는 일반 사람 중에서 보혜사라는 단어를 듣고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옛날 <개역 성경>이 한자 성경을 따라서 보혜사로 번역한 뒤로 그걸 정확한 우리말로 바꾸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영어 성경은 보혜사를 Comforter, Counselor, Advocate, Helper, Intercessor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보혜사라는 뜻은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or), 돕는 자(Helper), 중보자(Intercessor), 변호자(Advocate)”입니다. 그래서 보혜사는 이름의 뜻과 같은 일들을 감당하는데, 법정에서 피고를 변호하는 변호인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령이 성도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시는 역할을 상징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대리자로 보혜사가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는 성령이 예수님의 부재중에도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진리로 인도하시는 역할을 감당하심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위로자이자 돕는 자로, 어려움과 고난 중에도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령을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신해 보내신 배경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6:7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 말씀만 읽으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먼저 배경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배경 이야기는 요 13장부터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앞둔 상황에서 유월절 만찬으로 불리는 저녁 식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어서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내놓겠다고 큰소리치자, 예수님께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로 모든 일이 예수님이 말씀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팔려서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어찌할 줄 모르는 오합지졸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들었던 말씀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제자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제자들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할 상황이기는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일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할 사명을 주신 이유나 능력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 공동체가 공중분해 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교회가 역사에 굳건한 자리를 잡게 된 건 거의 기적과도 같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는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볼 때 기원후 60년대에는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수제자 베드로,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교리적 체계를 세운 바울이 모두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무너진 70년 이후로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축출되기 시작했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로마 제국의 박해 앞에서 무방비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그 무자비함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의 지성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들이며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다가 그들이 기다리던 예수님의 재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흩어지는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는 더 단단해졌습니다. 더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두려워서 숨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그대로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무슨 힘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수 있었을까요?

요 14-16장에 걸쳐서 세 번 반복된 보혜사 성령이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이 어떤 영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요 14:26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영입니다. 요 15:26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이 구절에서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진리라는 사실이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읽은 요 16:7에서 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영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떠난 세상에서도 제자들이 신앙을 지켜낼 수 있는 내적 근거가 바로 보혜사 성령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재 속에서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임재의 방식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은 무엇인지 말씀 속에서 알아보겠습니다.

2. 보혜사 성령의 일(사역) : 죄, 의, 심판에 대한 책망(8-11절)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시는데, 8-11절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 첫 번째는 죄(罪)에 대한 책망입니다. 9절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죄는 율법을 어기거나 이웃을 해치거나 또는 양심에 위배되는 것들을 행했을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불신앙이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은 모든 죄의 근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하는 일은 죄책감이나 정죄가 아니라, 죄의 실체를 깨닫게 해서 회개와 믿음으로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을 밝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시는 사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성령의 책망은 구원의 시작점이며,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날마다 회개와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느 날, 대형 여객선이 바다에서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고, 구조대는 급히 도착해 구명보트를 준비했습니다. 구조대원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에 구명보트가 있습니다! 이 보트에 타십시오! 타기만 하면 안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감사하며 구명보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수영을 좀 하니까, 나는 내 힘으로 헤엄쳐서 갈 수 있어.” 또 어떤 이는 말했습니다. “구명보트가 진짜 안전한지 어떻게 알아? 혹시 다른 구명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 사람들은 결국 구명보트를 타지 않았고, 구조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예화에서 구명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은 죄 가운데 있는 인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기 의지나 판단을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유일한 구원의 방법을 거부하는 반역이며, 그래서 그것은 ‘죄’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 두 번째 일은 의(義)에 대한 책망입니다. 10절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우리는 보통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야’라고 말합니다. 로마 사람들도 정의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지중해 연안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자신들이 정의를 실현하는 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도 비슷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의와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의’가 다릅니다. 10절이 말하는 의(δικαιοσύνη)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가리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라는 문장에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는 불안전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이나 오늘의 법관이 얼마나 의로운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요?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악한 사람은 벌주고 착한 사람은 상주지만 그것도 잘못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권선징악은 윤리 방식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길이 없으니까 상과 벌로 정의를 세우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세상이 말하는 상과 벌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걸 실존 전체로 깨닫게 하는 영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었습니다. 오직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가난한 청년이 왕의 초청을 받아 궁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궁전에 입고 갈 만한 옷이 없었습니다. 낡고 찢어진 옷밖에 없었기에 초라한 모습으로 문 앞에 섰습니다. 경비병은 그를 막았지만, 왕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말했습니다.

“저 청년에게 내 옷을 입혀라.” 왕은 자신의 왕실 예복을 청년에게 입혀주었습니다. 청년은 그 옷을 입고 궁 안으로 들어가 왕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왕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외모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왕이 입혀준 옷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화에서 낡은 옷은 우리의 죄된 모습, 왕의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16:10의 ‘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은 예수님이 참된 의를 가지신 분임을 증명하며, 성령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믿도록 일하십니다.

보혜사가 오셔서 하는 일 중 세 번째는 심판(審判)에 대한 책망입니다. 11절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말을 당시 세상 사람들이 들었다면 동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당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혜사 성령이 심판에 대해서 책망할 것이라는 말씀은 사탄의 심판과 세상의 가치관이 전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한 존재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배하던 세상의 가치관과 판단 기준이 무너졌음을 나타냅니다.

즉, 세상의 통치자 사탄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세상에 심어놓은 불의와 거짓의 체계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에 의해 드러나고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보혜사 성령의 역할은 세상의 잘못된 판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령은 세상이 죄와 의, 심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그를 정죄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오히려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이 정죄를 받게 했습니다. 성령은 이러한 잘못된 판단을 드러내어 사람들로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은 사탄에 대한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미래에 있을 최종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이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가 이미 임하였음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어느 중소기업 사장이 회계사에게 말했습니다. “이번 세금은 좀 줄여서 신고해 주게. 어차피 걸리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회계사는 고민 끝에 단호히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정직하게 보고하지 않으면 제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다는 믿음으로 일합니다.”

사장은 화를 내며 그 회계사를 해고하고, 다른 회계사를 찾았습니다. 새로 고용된 회계사는 사장의 요구대로 조작된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처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2년 뒤에 국세청의 감사를 받게 되었고, 회사는 막대한 벌금과 함께 신뢰를 잃었습니다.

한편, 그 정직했던 회계사는 점점 평판이 좋아져 큰 회계법인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이 예화는 요한복음 16장 11절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잘 설명해 줍니다. “세상 임금”, 즉 사탄은 거짓과 속임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의 권세는 심판을 받고 무너졌습니다. 그 심판은 지금도 이 땅에 진리와 정직으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보혜사 성령 임재는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재하십니다. 13-15절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며,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제자들을 깨닫게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소용돌이 앞에서 제자답게 살게 하는 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갈 때 보혜사 성령이 임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자기 마음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들은 것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기억나게 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항상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또한 성령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결론 : 성령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삶

사랑하는 드림 가족 여러분, 예수님은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셨고,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살아갑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고, 복음을 전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신앙의 위기에 처했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깨닫게 하고 힘을 준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영으로 임재하셔서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큰 힘과 위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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