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을 구하라 하나님 나라를 받으리라!_누가복음 11장 1절-13절
평화교회 이윤원목사
누가복음 11장은 단순히 기도의 형식을 가르쳐 주는 교훈적 본문이 아니다. 이 11장은 한 인간의 신앙 태도와 영적 방향, 더 나아가 그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거대한 분기점을 보여주는 장이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두 부류의 사람을 병치한다.
한쪽에는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11:1)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제자들이 서 있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스승의 무릎 아래 앉아 하나님 나라의 길을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다.
다른 한쪽에는 예수의 능력과 권세를 직접 목격하고서도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11:15)고 왜곡하며 비난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서 있다. 그들은 빛을 보고도 어둠이라 말하는 자들이다.
누가는 이 극명한 대비를 통해 독자들의 영혼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자리에 서 있는가? 배우려는 자인가, 판단하려는 자인가? 무릎 꿇은 제자인가, 팔짱 낀 비평자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이는가 거부하는가를 가르는 본질적 질문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11:2).
이 첫 문장은 하나님 나라 신학의 심장부다. 하나님 나라의 기도는 인간의 필요나 소원 이전에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통치를 먼저 구한다. 기도의 출발점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관계 회복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πατήρ(파테르), 곧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규정하는 선언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나라의 자녀로 선다. 이어지는 간구는 더욱 구체적이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3). 이는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맡기는 신뢰의 고백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1:4). 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한 내면의 정결을 구하는 기도다. 생존과 용서, 필요와 회복이 함께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삶은 균형을 이룬다.
예수는 밤중에 떡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를 통해 간청의 태도를 강조하신다(11:5–8). 문이 닫힌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 곧 ἀναίδεια(아나이데이아).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는 상황에 의해 침묵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현재형 명령으로 선포하신다. “구하라(αἰτεῖτε, 아이테이테), 찾으라(ζητεῖτε, 제테이테), 두드리라(κρούετε, 크루에테).” ”(11:9).
그리고 그 절정에서 이렇게 약속하신다.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13). 세 동사는 모두 현재형 명령법으로,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계속해서 구하고, 계속해서 찾고, 계속해서 두드리라는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복음 11장의 신학적 중심에 선다.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응답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성령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내면에 실제로 자리 잡는 방식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가치 체계가 전환되는 사건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은 분명히 증언한다. 로마서 8:6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선포한다. 성령은 우리의 사고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신다. 세상 중심의 계산에서 하나님 중심의 평안으로 옮겨가게 하신다.
또한 고린도전서 2:12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성령을 받는 순간, 판단의 기준이 달라진다. 세상이 옳다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분별하게 된다.
갈라디아서 5:16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권면한다. 이는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전환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삶이다.
그리고 골로새서 3:2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촉구한다. 이는 현실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라는 초청이다. 성령은 우리의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려 영원의 빛 아래서 오늘을 살게 하신다.
이 말씀들 속에서 성령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성령으로 인도된 자들은 하늘의 것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임을.. 그러나 11장의 후반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준다. 이제 세상의 권력과 탐욕과 기득권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종교라는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어둠속에서 예수의 능력을 보면서도 “바알세불을 힘입었다”(11:15)고 왜곡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들 가운데 임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 빛을 거부한다. 사람들은 계속 표적을 요구한다(11:16). 그러나 예수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11:29)고 하신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11:34).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시선의 왜곡이다. 성령이 없으면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드렸다. 그러나 “정의와 하나님 사랑은 버렸다”(11:42). 겉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으로 가득하다(11:39). 성령 없는 종교는 외형은 있으나 생명은 없다. 통치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11장은 두 길을 제시한다. 한 길은 아버지를 부르며 성령을 구하는 제자의 길이다. 다른 한 길은 끝까지 자기 의를 붙드는 종교인의 길이다.
제자는 무릎을 꿇는다.
종교인은 자리를 지킨다.
제자는 성령을 구한다.
종교인은 체면을 지킨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문제 해결인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인가? 눈에 보이는 응답인가, 우리 존재를 재편하는 성령인가? 삶의 적용은 분명하다. 매일 “아버지”라 부르며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끈질기게 성령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다. 성령을 구하는 자의 오늘 속에서 시작된다. 문은 아직 열려 있다. 지금도 주님의 음성이 울린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성령을 구하는 자,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그의 생각과 판단과 삶의 자리에서 장엄하게 시작된다.
후반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능력을 보면서도 “바알세불을 힘입었다”(11:15)고 왜곡한다. 예수는 선언하신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들 가운데 임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 빛을 거부한다. 사람들은 계속 표적을 요구한다(11:16). 그러나 예수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11:29)고 하신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11:34).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시선의 왜곡이다. 성령이 없으면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드렸다. 그러나 “정의와 하나님 사랑은 버렸다”(11:42). 겉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으로 가득하다(11:39). 성령 없는 종교는 외형은 있으나 생명은 없다. 통치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11장은 두 길을 제시한다. 한 길은 아버지를 부르며 성령을 구하는 제자의 길이다. 다른 한 길은 끝까지 자기 의를 붙드는 종교인의 길이다.
제자는 무릎을 꿇는다. 종교인은 자리를 지킨다. 제자는 성령을 구한다.
종교인은 체면을 지킨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문제 해결인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인가? 눈에 보이는 응답인가, 우리 존재를 재편하는 성령인가? 삶의 적용은 분명하다. 매일 “아버지”라 부르며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끈질기게 성령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다. 성령을 구하는 자의 오늘 속에서 시작된다.
문은 아직 열려 있다.
지금도 주님의 음성이 울린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성령을 구하는 자,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그의 생각과 판단과 삶의 자리에서 장엄하게 시작된다. 누가복음 16:16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천국을 어떻게 우리의 믿음으로 성취하느냐를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침노하느니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 임한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열정적으로 분발하고 노력하는 자들이 그 나라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노하느니라”는 말씀은 구속사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선언입니다. 구약 시대는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던 시대였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냈고,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를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을 기점으로 시대는 전환됩니다. 약속의 시대에서 성취의 시대로, 예언의 시대에서 복음의 시대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멀리 예고된 미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선포되고 임하는 현재적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침노한다”는 표현은 자칫 폭력적으로 빼앗는다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도는 단순한 폭력이나 물리적 강탈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강한 열정, 적극성, 간절함을 담고 있습니다. 곧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심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천국은 아무 의미 없이 흘려 듣는 자들에게 열리는 나라가 아니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모하는 자들에게 열리는 나라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침노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공로나 자격을 내세우기보다,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는 수동적인 방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선포될 때 그것을 지적으로만 동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으로 받아들이고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죄의 습관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으며, 영적으로 분발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자신의 삶에 실제로 적용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는 기도와 말씀, 회개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붙드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역동성을 드러냅니다. 천국은 그저 언젠가 가게 될 장소로 막연히 기다리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고, 지금 여기서 믿음으로 참여해야 할 통치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수동적인 관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듣고도 미루는 태도, 알면서도 결단하지 않는 태도를 넘어서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침노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삶의 방향을 전환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방관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심으로 사모하며 붙들고 있는가?
복음을 들었다면 이제는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간절히 구하는 자, 믿음으로 붙드는 자, 삶으로 순종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세례 요한 이후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그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고 열정적인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그의 생각과 판단과 삶의 자리에서 장엄하게 시작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결단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성공과 힘과 소유를 기준으로 삶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그 기준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높다 하는 것을 무조건 좇지 않고,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을 함께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중심을 붙드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사람, 곧 제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제자의 길은 화려한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손해 보는 길처럼 보이고, 침묵하는 길처럼 보이며, 용서하고 양보하는 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납니다. 직장에서 정직을 선택하는 것, 가정에서 먼저 사과하는 것, 교회에서 이름 없이 섬기는 것, 억울함 속에서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이 모든 선택이 예수의 길을 따르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성령을 구하는 사람은 기도에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순종합니다.
“아버지”라 부르는 기도는 하루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의 일정과 염려를 붙들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루의 선택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오늘 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감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하소서.”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실제적인 삶입니다.
또한 성령을 구하는 기도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막연한 감동이 아니라, 내 성품이 변화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쉽게 분노하는 성향, 비교하며 낙심하는 마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놓고, 온유와 절제와 사랑의 열매가 맺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문제만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새롭게 빚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의 삶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배우고, 서로 권면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더욱 견고해집니다. 서로의 짐을 나누고, 넘어질 때 일으켜 세우며, 함께 말씀 앞에 서는 공동체가 될 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더욱 선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여러분을 이 길로 초대합니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십시오.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을 더 귀히 여기십시오. 사람의 박수보다 주님의 기쁨을 더 사모하십시오. 그 길이 바로 예수께서 걸으신 길이며, 우리가 따라가야 할 제자의 길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붙드십시오. 낙심하지 말고 두드리십시오. 흔들리지 말고 찾으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구하십시오.그 나라는 이미 오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자리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또한 다시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그리고 그 믿음에 따른 순종의 삶 속에서 날마다 자라고 있습니다.
성령을 구하는 자,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마음을 지키시며,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택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 위에, 일터 위에, 교회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여 평안과 기쁨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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