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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약함과 악함_마27:1-10_칠리왁한인장로교회 장영훈 목사

약함과 악함_마27:1-10                                                                 

칠리왁한인장로교회 장영훈 목사

오늘 유다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주님이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뭘 드러내는가 하면 그는 예수님을 따랐던 의도와 목적이 다른 제자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몇 군데 성경을 확인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13:27~29 입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사실 유다를 향해 말씀하시는데 아둔한 제자들은 선 듯 못 알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바깥으로 나갑니다. 그때가 성경은 이렇게 표시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칠흑 같은 어두운 밤으로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만난 이 장면은 굉장히 마음 아픈 장면입니다. 이 전에 누구의 배반을 확인했습니까? 가장 믿었고 수장격이었던 베드로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가 뭘까요?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약함과 악함. 약함은 말 그대로 연약한 모습이 마지막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 뿐입니다. 유다는 뭐가 달랐을까요? 그는 ‘악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영적인 문제였다는 뜻입니다. 그는 결국 자결로 생을 끝냈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서 유다가 주는 교훈이 어떤 메시지가 담아져 있을가를 봅니다.

27:1절입니다. 이른 시간에 모이죠. 의논했다는 말은 정식회의가 아니란 뜻입니다. 사적인 미팅으로 보시면 됩니다. 드디어 결박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사형을 받고 이제 죽기로 의도되고 작정이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일찍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41:9 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과정 중에 하나이죠. 마태라는 기자는 굉장히 독특합니다. 마태복음은 분량도 가장 많지만 특별히 구약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한 기록물중의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빼곡히 뭘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14대 14대 14대, 족보로 시작이 됩니다. 그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편견적 확증을 통해서 이런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아, 마태복음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정말 예수님은 인류의 역사 속으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게 틀림없구나! 예수님의 인성을 증명하거나 드러내는 기록장치로만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요인이 있긴 하죠. 하지만 마1장의 족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의미보다는 어디에 초범이 맞춰져 있는가 하냐면 그 사이에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네 여인이 등장을 합니다. 네 여인의 관련된 구약의 배경적 히스토리는 참담한 히스토리들이 있어요. 유다의 며느리 다말도 들어가 있고 또 그 외에도 도저히 우리 정상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얘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족보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초점이 있기 보다는 인간의 반목과 반역과 불순종에 역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예언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데 예언의 성취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듯이 예수는 연약함, 허물, 우리의 반역 이런 것들을 뚫어내고 결국 우리를 또 다시 만들어가십니다. 

베드로의 무너짐 속에 그 강력한 메세지가 담아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유다의 배반 속에 인간의 악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열심히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더듬거리고 악을 도모하고 악을 꾀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사랑을 막진 못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막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도 유다의 이야기도 결국 인간의 이야기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순종과 악함을 하나님은 넘어서서 우리를 위해 예수를 갈보리 언덕 위에 세우시고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이 이야기가 마지막 모아야 할 시선입니다. 3절을 보죠.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뉘우쳐’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데 헬라어로 ‘메타멜로마이’입니다.  이 말은 ‘일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으려고 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이거 어떡하나 근심했다’. 이렇듯 두 가지 의미가 가능합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가 뭐냐면 유다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 한번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고 기껏 최고로 높여 불렀던 표현이 랍비입니다. 선생님! 예수님과의 관계를 옅게 희미하게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결박되는 것을 보고 ‘아! 내가 기대했던 그림이 이 그림이 아닌데’ 근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저질러서 지금 보고 있는 이 상황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유다는 사실상 후회스럽게 마음에 매워진 자기의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인간적인 정죄를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합니다. 성경에 버전이 두 개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가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 끔찍한 표현을 고스란히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누가의 관점입니다. 마태는 어떻게 기록했나 보죠. 

사실 사도행전의 기록과 마태의 기록은 다른 각도에서 죽음의 장면을 섬세하게 묘사했지만 결국 죽음을 다른 각도에서 본 것뿐이지 장면은 같다고 보는게 정설입니다. 목을 매어 죽은 건 맞습니다. 처리하는 과정에서 떨어져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는 것으로 누가는 봤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가 이익을 위해서 챙겼던 은30을 종교지도자들에게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죄는 네 몫이니까 우리는 돈을 않받겠다’며 성소에 던져 놓고 갔습니다. 누가 수습을 했는지 잘보세요. 6절입니다.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않다 하고”

이것은 핏값이라~ 율법에는 이런 부정한 돈을 성전 금고에 넣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명기 23장).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나 7절을 보겠습니다.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이 표현은 예레미야의 내용입니다. 예레미야가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토기장이의 밭을 사죠.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밭을 왜 삽니까? 그것은 회복을 소망하고 담보로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이 내용을 스가랴 선지자가 시대적 배경을 담아서 예언을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장면까지를 자세하게 예언했던 중요한 선지자중의 한 분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마1:22절에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를 향하여 대속의 제물로 죽어가는 과정에서도 사용된 악한 도구가 놀랍게도 구약의 예레미야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하고 진행되고 있음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 전 과정이 사실은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적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메세지를 기도 제목 겸 붙들어야 합니다.

첫째는 약함과 악함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약함은 그 약함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악한 도구로 쓰임 받은 유다는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뉘우치는 정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무늬는 제자처럼 보였지만 그에게는 참된 인격적 관계가 배제된 생명이 없었습니다. 이를 오늘날 무늬만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내가 형태적으로는 교회 등록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하등 다른 그리스도인과 다른 게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보이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 성도입니다. 끊임없이 내 속에 그 분출하는 생명이 희열과 기쁨을 잃어버린 채 예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유다의 차이는 생명이 있는가? 생명이 없는가? 이 차이입니다. 우리가 깊이 아주 냉정하게 십자가의 사건 앞에 자신을 이렇게 비춰봐야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십자가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으로 가슴 중심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가? 베드로처럼 비록 약해서 넘어질 때가 있지만 그럴 때도 주를 향하여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가? 그 점검이 성도에게 첫 번째 필요한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지나간 인생의 시간들은 전부 누구의 경영 속에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경영 속에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미래의 10년, 20년 계획을 세울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시간은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오늘 내가 머물러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주권자이심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다는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고 제자들처럼 보였지만 결국 돈궤를 맡아 도둑질했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쫓았던 예수가 가장 무기력하게 사형수의 몸으로 결박당한 것을 보고서야 아차 뭔가 잘못된 것 같구나! 자기의 현주소에 대한 절망으로 생명이 없기에 거기서 물리적인 목숨을 끊어버리는, 해서는 안되는 자살을 한 것입니다. 자살이 왜 악한 죄인가 하면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별게의 문제입니다. 자살은 구원을 받았냐 않받았냐고 접근해서는 안되고, 생명의 주권자가 누구인가?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울하고 내 삶이 힘겨울지라도 그때마다 나는 베드로의 회개로 갈 것인가? 그냥 유다의 악함으로 끝날 것인가? 이 기로의 앞에서 내가 영원한 생명 있는 자인가? 스스로 물어야 헙니다.

마지막으로 요13:27~29을 보겠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여기서 제자들과 유다가 공통으로 겪는 암울함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이 던지는 말귀를 알아 듣고 있습니까? 못알아 듣고 있습니까? 못알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우리가 이 본문을 정리하면서 구해야 될 기도제목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마다 꼭 기도할 것은, 하나님! 주의 음성을 대하고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와 들을 귀를 주시옵소서!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데 똑같은 사건을 봐도 어쩜 저렇게 이해가 다르고 해석이 다를까? 깜짝 놀랍니다. 무엇이 지혜고 복이겠습니까? 그 말씀에 들을 귀가 있는 것이 지혜고 원초적인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열려지고 들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