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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용납, 참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리는 믿음입니다_골 3:12-17, 엡 4:1-3, 킹스턴선교교회 김기덕 목사

용납, 참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리는 믿음입니다_골 3:12-17, 엡 4:1-3

킹스턴선교교회 김기덕 목사

‘진품명품 제자의 조건’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정직과 약속, 충성, 그리고 용서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명품 시계나 가방의 진품과 가짜는 과연 어디서 판가름 날까요? 겉으로 보이는 전체적인 모양은 가짜도 기가 막히게 흉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품은 겉이 아니라 ‘속’이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안쪽의 바느질 땀새, 가죽의 미세한 마감 처리, 시계태엽 안 톱니바퀴의 정교함 같은 ‘디테일’의 차이입니다.

진품과 가품은 바로 그 미세한 디테일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모여서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모습만 보면 누가 진짜 제자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겉모습은 다 거룩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진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바로 ‘관계의 디테일’입니다. 나랑 안 맞는 사람, 내 신경을 긁는 사람, 심지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십시오. 그 사람 안에 생명력 있는 복음이 작동하고 있는지, 아니면 종교적인 껍데기만 남아있는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제자도의 가장 아프고도 치열한 조건 하나를 제시합니다.

바로 ‘용납’입니다.

여러분, 지난주 우리는 ‘용서’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용서가 상대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내 마음의 빚과 분노를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는 것이라면, 오늘 이야기하는 용납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용서는 미움을 풀어내는 것이고, 용납은 그 사람을 다시 품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관계의 상처를 끊어내지 않는 은혜라면, 용납은 그 관계를 다시 떠받쳐 세우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용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음이 어떠십니까? 답답해지고, 억울해지고, 벌써부터 가슴 한구석이 막히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누군가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일에 너무나 서툽니다.

1. 용납의 출발점 – 우리는 이미 용납받은 자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내 마음에서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곧 용납한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는 뼈 깎는 고통입니다. 어떻게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용납을 요구하면서, 가장 먼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다짜고짜 “너희들 제발 좀 참아라. 싸우지 마라”라고 도덕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명령하기 전에 우리의 ‘신분’을 먼저 상기시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이것이 복음의 위대한 방식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명령 이전에,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먼저 선포합니다. 내가 어떤 은혜를 받은 존재인지를 뼛속 깊이 자각할 때, 비로소 내 삶의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13절 보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용납의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이를 악물고 참는 것, 눈을 감고 못 본 척하는 것, “내가 참자, 내가 참자” 혼자 되뇌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아는 용납입니다.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용납은 전혀 다릅니다. 

여기에 나오는 ‘용납하여’라는 헬라어 단어는 ‘아네코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기둥이 무너져 내릴 때 밑으로 들어가서 그 하중을 내 어깨로 ‘떠받쳐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약해서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흔히 정죄하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거 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왜 그렇게 살아?”하며 밀어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용납은 속으로 삭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너지는 형제의 하중을 내 어깨로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사 현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이 냉장고를 옮기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발을 헛디뎌 잡았던 손을 놓쳤습니다. 냉장고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욕을 하거나 손가락질합니까? 아닙니다. 있는 힘껏 그 무게를 받아냅니다. 쓰러지지 않도록 올려 붙잡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용납입니다.

누군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실수할 때, 흔들릴 때, 약점이 드러날 때, 판사가 되어 판결문을 작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옆에서 그 무게를 함께 받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네코마이’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안에 누가 있습니까?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기대에 못 미치는 배우자가 있습니까? 몇 년이 지나도 성격이 안 바뀌는 것 같은 성도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들을 포기하거나 무조건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들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쓰러지지 않도록 옆에서 받쳐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이타적인 사랑이 가능합니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에는 그럴 만한 자원이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죄와 허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더럽다고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친히 그 무너져 내리는  내 죄의 하중 아래로 들어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온몸이 찢어지고 으스러지기까지 나를 ‘아네코마이’, 나를 떠받쳐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지를 발견하고, 그런 나를 밑바닥부터 떠받쳐 안아주신 그리스도의 찢겨진 어깨를 경험한 사람만이, 내 곁에 있는 연약한 형제를 향해기꺼이 내 어깨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용납의 출발점은 내 인내심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용납하신 그 거대한 사랑이 내 심령을 강타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품어내는 진품명품 제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2. 용납의 태도 – 십자가를 통과한 겸손과 온유

그렇다면, 이 엄청난 십자가의 용납을 받은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서로를 안아주어야 할까요?

에베소서 4장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서로를 ‘아네코마이’ 하기 위해, 우리 마음의 두 가지 그릇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겸손’과 ‘온유’입니다.

당시 로마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단어들을 설교했다면, 그들은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로마는 힘과 권력, 짓밟고 일어서는 자부심이 미덕인 사회였습니다. 겸손을 뜻하는 헬라어 원어는 스스로를 낮고 비천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오직 힘없는 노예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가장 천대받던 이 단어들을 끄집어내어, 가장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 격상시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겸손은 패배가 아닙니다. 겸손은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나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것이며, 그로 인해 내 곁에 있는 형제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먼저 배려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또 어떻습니까?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 원어는 길들여진 야생마를 묘사할 때 쓰던 단어입니다. 말은 엄청난 근육과 달릴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고삐 아래 완전히 통제되어 있을 때, 그것을 온유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내게 힘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내가 백 번 옳고 상대가 틀렸음을 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지만, 성령님의 다스리심 아래 그 날카로운 칼집을 꺼내지 않고 기꺼이 내려놓는 절제된 능력이 바로 온유입니다.

추운 겨울,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서로의 체온을 나누려 모여듭니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고, 놀라서 다시 떨어지면 추위에 떨게 됩니다. 그래서 고슴도치는 서로에게 상처를 덜 주는 적당한 거리를 찾아가며 체온을 나눕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시를 가진 고슴도치들입니다. 내 가시에 누군가 찔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과, 누군가의 가시에 찔렸을 때 즉각적으로 쏘아붙이지 않는 ‘온유’만이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서로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한마디 말씀으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고 침 뱉는 자들을 당장이라도 쓸어버리실 권능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자신을 찌르는 자들을 향해 그 어떠한 폭력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라며 극한의 온유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겸손과 온유가 내 고집스러운 마음을 깨뜨릴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가시에 찔리면서도 기꺼이 서로를 보듬어 안는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3. 용납의 목표 –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라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용납이 향해야 할 최종적인 목적지를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선포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동사가 무엇인지 눈에 들어오십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힘을 다해 하나가 되어라!”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 되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보혈로, 예수 그리스도의 찢겨진 살을 통과하여 피로 맺어진 한 가족,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완료된 기적입니다.

골로새서 3장 14절은 놀라운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온전하게 매는 띠 이것은 헬라어 원어로 ‘함께 묶는 것’, 즉 ‘인대’라는 뜻입니다.

우리 몸의 인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대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대가 없으면 뼈가 제자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인대가 끊어지면 아무리 강한 근육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런데 사탄은 끊임없이 이 사실을 잊게 만듭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연령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출신 지역이 다르고, 신앙의 스타일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를 이간질합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포장하여 서로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하면 이 분열의 영을 이기고 연합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묶이라고 말합니다. 흩어지는 모래알 같은 우리를 단단하게 결속시키는 것은, 내 인내심이나 친목 도모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평안이라는 밧줄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보십시오. 이 두 사람은 복음을 위해 함께 목숨을 걸었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마가 문제로 심한 다툼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마가를 데려가는 것을 거부했고, 바나바는 마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섭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 하나를 봅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도 관계 안에서 깊은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훗날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이렇게 씁니다.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갈라섰던 마가를 다시 부릅니다.

바나바의 용납이 마가를 회복시켰고, 시간이 흐른 뒤 사도 바울도 그 회복된 마가를 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용납은 한 사람을 살립니다. 그리고 살아난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용납하지 않았다면 마가복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시카고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네 딸마저 바다에서 잃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실과 고난 속에서 그 영혼을 단단히 붙잡아 준 것이 바로 ‘평안의 매는 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옥같은 찬송시를 작곡합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을 작사한 스패포드입니다.

그 성령의 평안이, 이제는 우리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사람과 부딪힐 때 우리 공동체를 끊어지지 않게 묶어주는 단단한 줄이 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 입지 않고 한 번도 싸워보지 않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교회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부딪혀 깨어지고 상처 입었을 때, 성령의 평안이라는 매는 줄로,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품어내는 교회가 진품명품 교회입니다. 우리 킹스턴 선교교회 공동체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각자 다른 고향에서, 다른 사연을 들고 이 낯선 땅 캐나다에 왔습니다. 이민의 고단함, 언어의 장벽, 자녀 교육의 무게, 노후의 불안, 각자의 짐을 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다양한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같은 고향도, 같은 취향도, 같은 세대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같은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그 사랑의 줄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조금만 상처받아도 가차 없이 끊어내지만, 교회는 피 흘리면서도 다시 끌어안습니다. 상처를 품고 복음으로 다시 붙여진 공동체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작품이 됩니다.

사랑하는 킹스턴 선교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붙들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하중을 내 어깨로 받쳐주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누구를 향해 내 가시를 내려놓고 있습니까?

그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이 공동체를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걸작으로 빚어가고 있습니다.

결론: 십자가의 은혜로 반응합시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투명 인간 취급하는 대상이 있습니까? 내 힘으로는 절대 그 사람을 품을 수 없습니다. 다가가려 할수록 위선만 남고 상처만 덧날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사람을 보기 전에 먼저 십자가를 우러러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어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갈 때에, 그런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아오셔서 기어이 당신의 품에 나를 안으시고 피 흘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여러분의 강퍅한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나 같은 죄인도 용납하셨는데, 나를 밑바닥에서부터 떠받쳐 주셨는데, 주님, 내가 저 형제를 향해 어떻게 돌을 던지겠습니까!” 이 부서짐이, 이 애통함이 우리 심령에 터져 나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아네코마이’ 하셨듯, 이제 우리가 서로에게 어깨를 내어줄 차례입니다. 내 기준을 꺾어 겸손의 옷을 입고, 나의 혈기를 꺾어 온유의 옷을 입고, 평안의 매는 줄로 묶인 이 거룩한 공동체를 목숨 걸고 지켜내십시오. 이것이 삶의 디테일에서 승리하는 진품명품 제자의 모습입니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정죄와 단절의 칼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피 묻은 손으로 서로를 안아주는 위대한 용납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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