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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하필 그 날, 하필 그 곳. (카라-만남을 이끄시는 하나님)_룻기 2장 3절 / 창세기 24장 12~15절_밴쿠버 브니엘교회 이의정 목사

하필 그 날, 하필 그 곳. (카라-만남을 이끄시는 하나님)_룻기 2장 3절 / 창세기 24장 12~15절

밴쿠버 브니엘교회 이의정 목사

성도님들께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 날, 그 곳에 가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날 그 모임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 그 사람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건넨 초대를 거절했다면, 지금 다니는 교회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당시에는 그저 평범한 하루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특별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 그 만남이 내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참 신기하지, 하필 그 날, 그 곳에 갔어,” “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을 만났어.” “조금만 늦었어도 서로 지나쳤을 텐데.” 우리의 인생에는 이런 ‘하필’이 있습니다. 물론 ‘하필’이라는 부사가 반갑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필 그 날 그런 일이 생겼을까?” “하필 그 때 그 말을 내가 왜 들었을까?” “하필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까?” 어떤 날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날이고, 어떤 날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입니다. 어떤 만남은 지금도 감사하지만, 어떤 만남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말씀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우연히 좋은 사람을 만나서 인생이 잘 풀렸다는 이야기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온 모든 일이 사실은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님들께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 날에도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셨을까요?” “나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그 곳에서도 하나님은 내 삶을 붙들고 계셨을까요?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수많은 만남을 통해 결국 누구에게로 나를 이끌고 계실까요?”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고자 두 사람을 만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만나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누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길을 나섰습니다. 룻과 아브라함의 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출발은 달랐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서로 다른 걸음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먼저 룻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그녀는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구하러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룻기 2장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룻기 1장의 눈물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기근을 피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을 갔습니다. 살기 위해 떠난 길이었습니다. 그 곳에 가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오미의 남편이 죽습니다. 두 아들 또한 죽게 됩니다. 남편을 잃은 나오미와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가 남았습니다. 성경은 이 슬픔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짧게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 고통까지 짧았던 것은 아닙니다. 함께 식사를 하던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살아야 할 날은 남아 있는데, 그 날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 나오미는 결단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따라와도 내어 줄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룻은 나오미 곁에 남습니다. 시어머니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귀한 믿음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믿음의 선택을 했다고 해서 그 다음 날부터 생활이 쉬워진 것은 아닙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다고 곡식 창고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집안 형편이 저절로 좋아진 것도 아닙니다. 룻과 나오미에게는 당장 먹고 살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룻이 말합니다. 밭에 나가 이삭을 줍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룻을 너무 멀리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룻은 자기 인생에 어떤 놀라운 일이 펼쳐질지 기대하며 밭으로 나간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름을 남기려고 나간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오늘 먹을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을 뿐입니다. 그 마음은 우리도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아침에 집을 나섭니다. 자녀를 책임져야 하니까 일하러 갑니다. 갚아야 할 돈이 있으니까 출근을 합니다.  가족이 먹어야 하니까 장을 보고 밥을 합니다. 몸이 피곤해도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니까 다시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하루입니다. 그러나 그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도 이런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큰 꿈을 이야기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 잘 버티는 것이 먼저입니다.” 룻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룻의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밭으로 나가는 걸음,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는 손, 시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하루를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평범한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는 잊혀진 시간이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 가족을 위해 삼킨 한 숨, 맡겨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감당한 책임을 우리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룻은 몰랐지만 기록된 말씀을 읽는 우리는 알게 됩니다. 룻기 2장 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은 어느 밭이 자신의 미래를 바꿀 밭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나오미에게 보아스의 밭을 찾아가라는 지시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삭을 주울 수 있는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룻에게는 그 밭이 우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은 우리는 1절에서 이미 한 가지 정보를 받았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이었습니다.  룻은 모르는데 독자는 압니다. “룻아, 네가 지금 들어간 밭이 어떤 밭인지 아니?” 룻은 아직 모릅니다. 그 날 저녁 무엇을 가지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가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기대하게 됩니다. 이 만남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지켜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연히’라는 표현에는 히브리어 어근 “키라”가 사용됩니다. 일이 일어나다, 뜻밖에 마주치다라는 뜻입니다. “카라” 말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룻기를 끝까지 읽으면, 우리는 그 뜻밖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룻은 자기 삶의 한 장면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장면을 더 큰 이야기 안에서 이어 가고 계셨습니다. 이 차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을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아십니다. 우리는 눈 앞의 필요를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관계와 시간을 아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사건의 숨은 뜻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버스를 놓쳤다고 반드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그 관계를 무조건 계속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모든 상황을 해석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알기 전에 하나님은 룻을 알고 계셨습니다. 룻이 그 밭의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 여인의 눈물과 필요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 길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를 아시는 주님께 오늘 걸음을 맡깁니다.” 이 믿음이 불안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분명해서 걷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아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한 걸음을 걷는 것입니다. 

이제 창세기 24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찾는 중요한 일을 맡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이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도 관계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먼 길을 떠나 우물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자신에게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시고,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구합니다. 여기에도 같은 어근 ‘카라’가 사용됩니다. 이번에는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형태입니다. 문맥에 맞게 풀면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오늘 필요한 만남을 이루어 주옵소서.” 룻은 누구를 만날지 모르고 밭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우물가에 섰습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뜻밖의 만남으로 기록되고,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로 기록됩니다. 그런데 둘 다 자기 힘으로 미래를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오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이 것 아닙니까?” 열심히 준비한다고 모든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하지만 자녀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 없습니다. 건강을 관리하지만 몸의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지만 그 마음까지 내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막막합니다. 젊었을 때는 조금 더 경험이 생기면 모든 것이 쉬워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살아 보니 경험이 쌓일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때 우리에게 기도의 자리가 열립니다. 기도는 책임을 내려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을 감당하면서도,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판단에 지혜를 더해 주시옵소서.” “제가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이것이 우물가의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나옵니다. 그러나 종은 곧바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리브가의 행동을 지켜보고, 그의 가족을 확인하며,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봅니다. 기도하면서 분별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느낌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하지 않고, 말씀에 비추어 보고, 사람의 행동을 살피고, 공동체의 지혜를 구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을 때 자신을 자랑하기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만남 앞에서 머리를 숙여 경배했습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는 이런 고개 숙임이 있습니다. 내가 수고한 것도 사실입니다. 오래 걸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수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은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늘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룻과 아브라함의 종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움직였습니다. 룻은 밭으로 나갔고, 종은 먼 길을 떠났습니다. 결과를 다 알지 못했지만 오늘 맡겨진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때로 이미 알고 있는 순종을 미루기도 합니다. “좀 더 확실해지면 하겠습니다.” “형편이 좋아지면 시작하겠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준비되면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물론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충분히 살피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선한 일까지 모두 미룰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과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할 수 있습니다. 힘든 사람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습니다. 룻에게 미래를 보는 눈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오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밭에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밭은 어디입니까? 일터일 수 있습니다. 가정일 수 있습니다. 돌보아야 할 부모님일 수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큰 결심보다 작은 순종이 필요한 때가 많습니다. 전화를 한 통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미루어 둔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지쳐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때에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 한 걸음이 앞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오늘 걸을 수는 있습니다. 여기서도 잊지 마십시오, 룻이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 낸 것은 아닙니다. 많이 수고한 대가로 보아스를 만난 자격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 구매하는 보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오늘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잊지 않으셨다는 믿음으로, 내게 맡겨진 작은 일을 소중히 여깁시다. 나를 붙드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내가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입니까? 룻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보아스입니다. 우리는 룻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보아스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도와주는 사람, 알아주는 사람, 내 사정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당연한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질문을 하나 더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보내주신 사람에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룻이 보아스의 밭에 도착한 것만으로 그 날의 이야기가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보아스는 낯선 여인을 보고 그의 사정을 묻습니다. 들은 이야기를 마음에 담습니다. 룻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물을 마실 수 있게 하며, 식사 자리에도 초대하게 됩니다. 그의 친절은 마음속 생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먹을 것이 생겼습니다. 일할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줄어들었습니다. 룻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보아스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 우리 손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하지 못한 어려움을 혼자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줄 수는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필요한 도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섭리를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더 귀히 여기게 합니다. “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구나.” “오늘 내가 이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랑은 무엇일까?”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누군가 기다려 주었습니다. 누군가 기회를 주었습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기도했습니다. 그 도움을 준 사람이 모든 답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곁을 지켜 준 것이 큰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곁에 설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난 사람이 내게 무엇을 줄지 묻지 않고, 그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랑을 전할 수 있을지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의 만남, 카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자리가 됩니다.

교회의 개척을 준비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갈 사람들을 보내 주시옵소서. 그 만남이 순조롭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카라의 기다림 가운데 ‘우연히’ 영의 이삭을 주우러 방문하신 성도님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순조롭게 만나게 하여 달라는 저의 ‘카라’와 우연히 하루의 은혜를 구하시는 성도님들의 ‘카라’가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필 그 날, 하필 그 곳’이라구요. 하지만 누군가의 우연이, 순조로운 만남을 기다렸던 누군가에게는 하나님 주시는 섭리의 ‘카라’가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서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일하고 계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준비되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날, 그 곳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가 구할 것은 분명합니다. “ 하나님 이 만남 가운데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만남 가운데 예수님을 더욱 알기 원합니다. 교회에 익숙해지는 데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가 누군가의 기도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공동체를 통해 지친 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지나온 날과 오늘의 자리,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하는 내일의 모든 만남, 카라를 주님께 맡깁니다. 모든 만남 가운데 하나님께 드릴 영광의 일들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오늘 그러한 카라의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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