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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우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요한복음 3장 1-5절)_드림교회 고창석 목사

우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요한복음 3장 1-5절)

드림교회 고창석 목사

우리는 인간을 한 번 태어나는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두 번 태어나야 합니다. 처음 태어남은 어머니로부터이고, 두 번째 태어남은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두 번째 태어난 사람을 향해 ‘정신 차렸다’, ‘철들었다’, ‘각성했다’고 이야기하고, 종교적으로는 ‘거듭났다’고 합니다. 인간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박완서 선생이 책 읽는 재미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밖의 하늘이나 녹음을 보면 줄창 봐 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 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책 속에 많은 비밀이 담겨 있는데, 책을 통해 비밀을 깨달아 내 마음이 새로워지니 이전까지 늘 보아 왔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다, 하지만 내가 변하니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며 행복입니다.

인간의 다시 태어남은 철학에서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19세기 미국의 건국 이상을 펼친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 사상은 에머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그는 미국 정신사에 아주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에머슨은 인간을 ‘Over-soul’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Soul’은 평범한 인간을 말합니다. 부자 되기를 원하고, 건강하면서 명예와 권력을 소망하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인간입니다. ‘Over’는 그런 삶을 초월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Over-soul’은 현실에 안주하며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인생을 넘어서, 삶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찾는 존재입니다.

Over-soul은 단순히 에머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하기에 우리 신앙인에게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지만, 그 사람은 아직 온전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자신만의 주관 없이 다른 사람의 목적이 곧 내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자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목사였던 에머슨은 ‘생기’를 ‘Over-soul’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Over-soul은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인데, 여기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유대 경전을 해석하는 율법 학자이자,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여기에다가 오늘 말씀에 니고데모를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도자’는 한 지역의 유대인 회당을 책임지는 종교 지도자일 수도 있고, 지금 말로 국회의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의 일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어떻든 니고데모는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예수를 계속 예의주시한 결과, 예수가 메시아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고, 또 모든 산헤드린 멤버가 예수를 ‘먹보이며 술꾼’(눅 7:34), 혹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마 12:24)이라고 폄훼하기에, 사람의 이목이 쏠리지 않는 밤을 선택하여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 대화가 좀 이상합니다. 2절에서 니고데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러자 3절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나라를 물은 것도 아닌데, 예수께서는 거듭남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의 답변은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온 의도를 정확히 짚으신 대화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리스어 원문을 바탕으로 이 말씀을 다시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두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두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면 하나님의 나라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 신비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신비하지만, 다시 태어날 때 하나님의 나라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은 더 신비롭습니다. 

니고데모는 생전 처음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을 들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답게 이 표현을 있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서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라고 다시 예수께 묻습니다. 영의 세계를 모르니까 이런 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4차원적인 이야기를 하시는데, 니고데모는 3차원에 머물러 있으니 당연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자칭 유대교 지식인이라는 하는 사람의 무지몽매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함정에 빠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경전을 잘 지키는 것을 영적인 생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디딤돌은 디딤돌이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을 연결하여 읽으면, 요한복음 저자는 그런 유대교 지식인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이며, 지도층인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하지만 그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수가성의 사마라아 여인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여인을 만난 시간이 성경에서 여섯 시라고 하는데, 현대 시간으로는 정오입니다. ‘대낮’이었습니다(요 4:6). 햇빛이 제일 많이 내릴 때였습니다. 참, 절묘한 대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유대인, 그것도 유대인의 지도자는 어둠 가운데 있고, 그들이 상종 말아야 한다는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남편이 다섯이나 있다고 소문난 여인은 찬란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또 니고데모는 예수와 대화 하면서도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수가성 여인은 예수와 대화 후 예수가 바로 기다렸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요 4:29). 그리고 자기만 그 사실을 알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누가 더 믿음 있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어둠에 거하는 자와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자,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와 깨닫는 자, 요한복음 저자는 3장과 4장을 연결하면서 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영의 세계 근처에는 도달도 못 한 유대교 지도층을 은근히 비꼬고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예수의 제자가 된 니고데모였지만, 이 당시는 아직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무슨 뜻입니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임무를 받고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인데, 즉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 임무를 온전히 수행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거기에서 나를 깊이 응시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 또 묻는 일련의 과정을 겪어야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를 그리스어 ‘바실레이아’인데, 흔히 ‘왕국’, ‘나라’로 번역하지만, 사실 이것은 오역입니다. ‘바실레이아’의 히브리어는 ‘말쿠트’인데, ‘말쿠트’는 추상명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리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국가 간에 분명한 국경선이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어느 나라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말쿠트’가 추상명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지리적 구분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국경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면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박완서 선생의 ‘책 읽는 재미’를 다시 떠올려야 합니다. “책을 읽으며 내가 변하니 이전에는 아무런 감동 없이 다가왔던 것들이 이제는 새롭고 경이롭게 보인다. 참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는 분명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박완서 선생의 말처럼, 내가 변하면, 즉 영의 눈을 뜨면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눈을 돌리는 곳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거나 하나님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흔적이라고 해서 성지순례를 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흔적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는데, 만약 우리가 타인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5절에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처음 말씀하신 문장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를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로 풀어주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로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는 처음에 인간이 어머니 뱃속의 ‘물’에서 태어나는 자연적인 탄생이 있다고 한다면, 두 번째는 ‘성령’으로 태어나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물세례와 성령 세례로 이해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은 어머니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성령은 두 번째 태어남을 통해서, 즉 하나님의 영을 통한 회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 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라를 잃고 절망에 빠진 에스겔과 유대 백성에게 또 한 번 생기를 주셨습니다. 구약 에스겔 37장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 골짜기에는 당연히 매장되어야 시신들이 매장되지 않은 채 허연 뼈를 드러냈고, 그 뼈들은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에스겔 37장 5-10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그 뼈들을 향해 말씀하시자, 마른 뼈들이 움직이고 시작하고,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뼈들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또 가죽이 덮이니 사람의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자, 그 뼈들이 살아 큰 군대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환상입니다.

그런데 주 여호와께서는 단지 환상을 보여 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14절에 보면 절망에 빠져 있던 에스겔에게 특별한 것을 선물하십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완전히 죽었던 사람조차 살리는 생기, 특별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는 ‘생기’라 하지 않고 ‘내 영’이라는 적극적인 표현을 하십니다. 그리고 주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영을 아주 특별하게 다루십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주 여호와께서는 내 영을 너희 속, 즉 사람의 마음에 정성스럽게 놓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다시 한번 더 새겨졌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지울 수 없고, 영원히 존재합니다. 과거에 실종된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유전자는 아주 결정적인 자료입니다. 범죄 수사에서도 중요한 단서로 등장하는 것이 DNA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내 영’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정성스럽게 놓으신 ‘내 영’,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DNA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DNA를 통해 육체적인 존재를 넘어 영적인 존재가 됩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을 육체의 존재로만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육체에 즐거움을 주는 쾌락에 경도되고, 중독되어 다시는 자신이 정신적인 인간, 영적인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인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배웁니다. 그것이 정신적인 인간입니다. 정신적인 인간은 자기 몸뚱이라는 육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존재, 다른 사람, 다른 생명에 희로애락을 알기 위해 배웁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적으로 고양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 여호와께서는 육체적으로 발달 되거나 정신적으로 고양된 사람보다 더 중요한 화룡점정, 마지막 점을 찍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14절 말씀을 다시 보면,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DNA인 영을 가질 때, 인간은 육체적인 동물과 정신적으로 고양된 교양인에서 승화되어 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볼 수 있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도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믿는 일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5-16절입니다.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온전히 믿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록 믿기 어려울지라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합니다. 그 두 번째 태어남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으로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찬양합니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DNA를 회복하는 것이고,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Over-soul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할까요? 지금까지 보았던 그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가 보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보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자연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면! 이런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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