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년 교회와 코이노니아(7)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디베랴 호수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물고기를 백쉰세 마리나 잡도록 기적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미리 빵 한 덩이와 생선 한 마리를 숯불에 구워 준비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제자들에게 빵과 생선을 가져다주시면서 조반을 들게 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하셨다. 여기서 이것들은 잡은 물고기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이 물고기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고기들을 잡는 것에 마음이 온통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부였던 베드로에게 물고기는 가족의 생계 수단이자 부의 축적 수단으로 재물과 같다. 이는 마치 농부들에게 곡식이 그러했던 것과 같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명하셨다(요한복음 21:15). 물고기보다, 재물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그 물고기를, 그 재물을 가지고 예수님의 어린 양들을 먹이면서, 성도들을 목회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물고기를 153마리나 잡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또 빵과 물고기를 배고픈 제자들에게 주셔서 먹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또 하나의 ‘작은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신 것과 같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명하신 것은, “내가 너희에게 빵과 물고기를 먹인 것처럼, 너희도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일이란, 식탁 사역(구제)뿐만 아니라 말씀 사역(전도, 교육)의 뜻도 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하다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식탁 사역을 위해 따로 집사들을 세우고, 자신들은 말씀 사역에만 힘쓰게 된 것이다(사도행전 6:1-6). 초대교회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기 위해 식탁 사역(구제)을 수행한 것은, 앞선 오병이어 기적에서 사도들이 무리들을 먹이기 위해 예수님이 떼어 주시는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식탁 사역을 수행한 것과 같다.
혹자는 넉넉한 성도들이 가족 몫을 초과하여 갖고 있던 땅들과 집들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는 ‘물질의 코이노니아’가, 초대교회 초기에만 잠시 나타났을 뿐이지 지속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42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코이노니아’와 ‘빵 나눔’(성찬)과 ‘기도’를 ‘잠시만’ 힘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끊임없이’, ‘항상’ 힘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가족 몫을 초과하는 땅들과 집들을 팔아서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 ‘물질의 코이노니아’가 초대교회에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려면, 그와 똑같이 ‘빵 나눔’(성찬)과 ‘기도’가 초대교회에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코이노니아’와 ‘빵 나눔’(성찬)과 ‘기도’는 모두 초대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한 묶음으로 계속해서 힘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빵 나눔’(성찬)과 ‘기도’를 계속해서 힘썼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신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가족 몫을 초과하는 땅들과 집들을 팔아서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 ‘물질의 코이노니아’ 역시, ‘빵 나눔’(성찬)과 ‘기도’처럼, 초대교회가 계속해서 힘썼다고 보아야 옳다.
물론 예루살렘에 있던 초대교회의 경우, ‘물질의 코이노니아’가 ‘영원히’ 지속된 것은 아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사도행전 8:1)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후 다른 지역의 초대교회들에서도 ‘물질의 코이노니아’는 지속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연보’(捐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