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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생각하는 침묵_최종원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VIEW)

사순절에 생각하는 침묵

최종원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VIEW)

성경 곳곳에서는 침묵하는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 승리한 후 큰 낙심과 침체를 경험한 엘리야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는 폭풍 속에도, 지진 속에도, 불 속에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세미한 침묵의 소리”(sound of sheer silence (NRSV)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열왕기상19:12). 침묵의 소리는 형용모순(oxymoron)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존재가 침묵입니다.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찾고 이해하고 적용하는 수고 못지 않게, 말해지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침묵의 메시지를 예민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표면적인 의미 너머 언어적, 비언어적 텍스트의 모호성과 다중성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침묵을 둘러싼 여러가지 상황을 다층적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침묵하는 억울한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말하기 권력을 독점한 이들이 만들어 낸 소음 같은 현실에서 힘없는 사람,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이사야 61:1,2)

가난한 사람, 마음이 상한 사람, 포로로 잡힌 사람, 옥에 갇힌 사람은 말할 권리를 상실한 침묵이 강제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인생에서 경험하는 침묵은 자발적이기 보다는 일종의 권리 부재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삶을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데 실패한 상황입니다. 어둠이 빛의 부재인 것처럼, 대부분의 상황에서, 침묵은 존재를 지웁니다. 침묵하는 이들의 소리를 귀 기울임으로써, 말의 본질적인 목적인 존재를 회복하게 됩니다.

침묵은 말씀이신 예수님의 성육신과 삶과 죽음으로 출발한 기독교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합니다. 스스로를 비워 종의 모습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빌립보서 2:7,8) 말의 권력을 포기하고 침묵하셨습니다.

침묵의 상실

초기 교회부터, 기독교에서 말이 가지는 힘, 발화권력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권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권리를 버리게 되면서, 기독교 역사에서 침묵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그 가치가 계승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을 거치며 개신교 지역에서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아쉽게도 침묵의 전통도 꺾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개신교 종교개혁기 이후 교회는 첫 2세기 이래 가장 시끄러운 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침묵 속에 진행되는 엄숙한 미사의식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풀어 전달하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중심에 있던 제단은 설교단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수도원들이 사라지면서, 명상이나 사색의 전통은 사라졌습니다. 수도회를 폐지함에 따라 개신교에는 침묵의 가치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말이 침묵을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리를 대변하는 소리는 강력한 권력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설교자의 소리를 가장 잘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설교자는 모두를 바라볼 수 있지만, 회중의 시선은 설교자에게만 집중하게 되는 부채꼴 형태의 아고라 광장 같은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개신교는 설교 외에 회중 예배에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날카로운 말씀과 뜨거운 찬양이 있는 열정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교회에 침묵이라는 단어를 갑작스럽게 떠올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기독교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와중에 침묵을 마주했습니다. 충격적인 하나님의 침묵과 사람들의 침묵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이들이 그 참상 속에 하나님이 왜 침묵하셨는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 사람들은 왜 자신의 부모들이, 형제자매들이 그러한 참상을 외면하고 침묵했는지는 잘 묻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는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성을 상실한 유럽인들이 침묵 속에 동조했기에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전에도 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사회진화론에 근거하여 집시, 동성애자, 아픈 사람들, 중범죄자, 알코올 중독자 등에 대한 반인륜적인 단종법을 시행했습니다. 그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강제된 침묵을 경험하는 이들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침묵을 하나님의 침묵으로 탓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섣부르게 얘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한국교회의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짧은 기간 세계가 주목하는 양적 성장을 경험하면서 교회는 인정과 영향력의 자리에 익숙했습니다. 늘 자신만만했습니다. 빼어나고 탁월한 설교자의 입에 수십 수만의 사람들의 눈과 귀가 집중되는 현장에서 침묵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때로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 침묵했고, 목소리를 내지 말아야 할 때 침묵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음으로 여겨졌습니다.

침묵의 의미

이제 기독교 전통에서 잊힌 침묵의 소리를 고민해 봅니다. 대체로 개신교인들은 말씀을 잘 배우고 묵상하는 가치를 앞자리에 둡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그 삶을 살아내려 애씁니다. 더 선명하게, 더 확실하게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확신이라는 단어는 참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묵상하는 훈련, 신학의 훈련도 필요하지만, 침묵도 계발해야 할 덕목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말씀의 부재가 아니라, 침묵의 부재를 경험하는지도 모릅니다. 침묵이 무엇인지 알 때만이, 침묵해야 할 때와 말을 해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 교회가 예언자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유는 침묵하는 자리에 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침묵 당하는 자의 하나님, 들려지지 않는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그 죽음은 그 들려지지 않는 자, 말을 빼앗긴 자들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의 탄원과 기도는 그 잃어버린 자들의 목소리를 찾아주려는 몸부림이어야 합니다.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 고통의 과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은 우리를 엇나가게 할 수도 있고, 우리로 더 깊은 하나님의 신비에 참여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들리지 않는 자의 편에 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 그 고통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강제된 침묵 속에 있는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장의 자리에서 판결을 내리기 보다, 우리를 대신한 피고인의 자리에서 침묵하며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이 침묵하셨느냐고 묻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억울한 침묵 당하는 자리에 이미 서 계셨습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침묵의 소리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뇌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속에서 우리를 대신해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어 그저 속이 타 들어 가는 침묵 속에 지켜보아야 하는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어 꺽꺽 대며 가슴만 치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심정일지 모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다만 잠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의 가장 큰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그 분의 방식일지 모릅니다.

침묵의 연습

그렇기에 침묵을 연습하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의 가장 극적인 실천 방식 중의 하나입니다. 때로 침묵은 그 어떤 설교와 웅변보다 더 깊게 전달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침묵하며 값을 치른 예수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잊혀진 것, 망각 속에 있는 것을 기억해 내고 들려지게 합니다. 강제된 침묵 속에 있는 것들을 구원해 내는 것이 역시 기독교입니다.

말씀의 뜻을 헤아리는 것처럼, 침묵의 뜻을 헤아리고 그 소리를 듣는 것이 기독교 영성에서 중요한 자리입니다. 모든 것을 말씀 안에서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어야 한다는 흔한 오해가 있습니다. 누구도 인생길에서 선뜻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역시 보이지 않는 희뿌연 안개 속을 헤쳐 가는 여정입니다. 말씀을 잘 이해하고, 그 속에서 개인에게 두신 확실한 뜻을 추구하는 애씀이 필요하지만, 더 많은 순간 침묵 속의 소리를 읽고 해석해 나가는 수고도 필요합니다.

주변의 소음과 내면의 시끄러움과 한 걸음 떨어져 작게 들리는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기만의 광야를 어디에서 마련할 수 있을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함께 하시는 성령께 같은 탄식으로 우리를 내려놓을 공간 말입니다. 그 공간은 때로 나만의 기도실일 수도, 일터 작업실이 될 수도, 반려견과 함께 하는 산책길이 될 수도, 아이들을 기다리는 운전석 공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 말씀을 묵상하듯, 하나님의 침묵을 묵상하고, 어둠 속에서 한 가닥 희미한 빛을 발견하듯, 침묵 속에 들려지는 한 작은 소리를 듣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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