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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행복을 당신 손 위에_사랑은 결단

행복을 당신 손 위에

<h2>사랑은 결단

보통 프러포즈라고 하면 핑크빛의 낭만적인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내겐 좀 당황스러운 사건이었다. 지금은 스무 살이 넘은 자녀들에게 그때 이야기를 해 주면 꽤 흥미롭게 듣는다. 그런 프러포즈가 어디에 있냐면서 별나고도 특이한 아빠의 프러포즈도 그렇고, 데이트 한 번도 안 하고 바로 받아들인 엄마도 신기하다면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1년 전, 대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교회 유년부 예배 준비가 있어 교회에서 토요일 교사들과 함께 모였었다. 그런데 모임 후 비가 세차게 내렸고 유년부 총무로 섬기던 교회 오빠가 비를 피하고 가자며 차 한 잔을 사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앞 커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교회 오빠였던 지금의 내 남편은 본인 집, 막냇동생 디모데에 대해 언급했다. 디모데는 88년생으로 오빠의 막내 이모가 친모이다. 그런데 전도사님이셨던 친모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조현병이 생기셨고,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하셨다. 막내 이모부가 미국으로 떠난 뒤 이모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의사들은 독한 약으로 인한 기형아 우려로 임신중절 수술을 권했었다. 하지만 오빠의 어머니는 절대로 임신중절은 안 된다며 낳으면 장애아라도 본인이 책임지고 키우시겠다고 하셨다. 연세가 드실수록 디모데의 장래가 걱정되셨던 부모님은 오빠에게 디모데를 부탁하는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커피숍에서 오빠는 돌연, 이런 질문을 했다. “디모데를 키워줄 수 있겠니?” 나는 그 물음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차리기도 전에 얼떨결에 대답이 나왔다. “글쎄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급히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어중간한 대답이 오빠에겐 긍정적인 Yes의 답으로 들렸나 보다. 이런 대화를 불편하게 하고 난 후 집까지 데려다준다며 함께 버스를 타게 되었다. 나의 겸연쩍고 당황한 모습을 보면서 오빠는 내게, 나는 오늘 너에게 프러포즈를 한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본인이 끼고 있던 은반지를 빼서 내 손가락에 끼워주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심란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부담이, 되는 이야기라 완곡하게 거절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편지지에다가 교회 오빠로서는 좋지만, 남자친구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내용을 최대한 부드럽게 구구절절, 거절의 의사를 밝히며 써 내려갔다. 

그리고 오빠에게 조심스레 그 편지를 건네주었다. 일이 잘되려고 그랬는지 오빠는 그 편지를 받고 학교 친구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내가 프러포즈하고 이런 편지를 받았는데 무슨 뜻이냐고 말이다. 

“더 잘해달라는 뜻이잖아!”

그제야 비로소 오빠는 거절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있고 난 후, 나는 오빠를 피하게 되었고 만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빠는 내게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내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짝이라고 받아들인 그는, 한결같은 모습을 잃지 않은 것이다. 

 대학 입학 후 어느 날, 수업을 마친 후 친구들과 함께 학교 정문을 나섰다. 남학생이 있을 리 없는 여자대학교 정문 앞에 꽃다발을 든 오빠가 검은 양복을 입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양복을 입은 이유는 그때 오빠가 교회 전도사님으로 일을 하고 있어서였다. 어찌 되었든 아직 친구들과도 가깝지 않은 사이였는데 오빠가 학교 정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그날 그렇게 프러포즈를 받은 이후 드디어 첫 데이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오빠는 성품이 참 좋았다. 늘 인자하고 따스한 성격이어서 언제나 만나면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 격려를 아끼지 않는 지지자였다. 또한, 늘 자신감이 부족한 나를 높게 평가해 주고 칭찬도 해 주며 무엇이든 내가 마음 두는 일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친구도 돼 줬다. 

같은 교회에서 사귀게 되어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특히 부모님들께서 한 교회에 다니시니 더욱 행실에 조심해야 했다. 오빠는 믿을 만한 남자친구였고 만날 때마다 즐거웠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아마도 이때의 행복했던 시간의 기억으로 훗날의 고난들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 교회에서 함께 자라다 보니 어찌 보면 한 가족처럼 너무나도 편안했던 교회 오빠가 내 남자친구가 되었다. 그는 인간관계가 좋아 아는 사람도 많았고 학교에 동기 친구들도 많았다. 반면 나는 내 인생에 남자친구란 처음이었고 모든 게 서툴렀고 아는 게 없었다. 

그는 당시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는 대학교 4학년 학생으로 용돈이 생길 때면 나를 만나 항상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다. 그리고 찬양을 무척 좋아하고 음악적 달란트가 있던 그는, 온누리 교회 목요 찬양 집회에 나를 많이 데리고 다녔다. 한때 음악이 너무 좋아 작곡가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목사님이 되려 했던 오랜 꿈과 갈등할 때, 오빠의 아버지께서 목사가 되면 음악도 많이 하지 않겠냐는 조언을 해 주셨다고 한다. 

기타도 잘 치고 피아노도 잘 치는 그는 노래까지 잘했다. 나를 만나면 가끔 노래도 불러주고 기타 연주도 들려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낭만적인 나날이었다.

어느 날, 둘이 만나 온누리교회 목요 찬양 집회 장소를 가게 되었다. 일찍 도착해서 갯벌 같은 곳을 거닐게 되었는데 그와 걷다가 그만 내 발이 진흙에 빠진 것이다. 빠진 것도 민망한데 진흙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버렸다. 나는 너무 창피해서 그만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그런 내 모습이 그의 눈엔 좋게 비쳤나 보다. 내 신발에 묻은 진흙을 휴지로 깨끗하게 닦아 주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참 고마운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연애하면서 그는 내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거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잘 만나고 헤어질 때가 되면, 나는 사모 감이 아닌 것 같으니 그만 만나자는 말로 그의 마음을 상하게도 했던, 것이다. 

그와 데이트하는 하루하루는 참 행복했다. 6년이란 시간을 연애하면서 그는 방위 근무도 마쳤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도 뜨겁게 연애하며 기회가 되는대로 자주 만났다. 정말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던 6년 동안, 아름다운 추억들과 에피소드를 참 많이도 모아둔 것 같다. 

그중 한 가지, 우리는 데이트할 때 종종 오빠의 막내아우, 디모데를 데리고 다니곤 했다. 올림픽 공원도 가고 대공원도 갔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었는데, 아마도 어린 학생 같아 보이는 내가 저렇게 큰 유치원생 아이가 있는가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오빠와 함께 디모데를 데리고 다니며 한글도 가르쳐 주고 즐거운 시간을 종종 보내곤 했다. 지금 그 꼬마는 잘 자라 니카라과 선교사가 되어 자랑스러운 주님의 아들로 살아가고 있다. 

오빠를 만나 사랑하며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어느새 교회 오빠에서 연인으로 발전이 되어 이제 오빠와의 결혼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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