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패밀리 얼라이브] <분노 이야기 7>   분노의 종류 3: 의로운 분노

<분노 이야기 7>   분노의 종류 3: 의로운 분노

의로운 분노란 일반적으로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불공정, 불의, 불평등, 부당한 일 등에 대한 분노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 같은 일은 위의 모든 영역을 다 포함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종 혹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여 불이익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일이며 불의에 해당하고 평등이라는 보편적 이념에도 어긋나는 일이며 부당한 일입니다. 누구라도 인종이나 피부색으로 인해 차별을 겪는다면 불편한 감정을 넘어서 그 일이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분노 감정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그 특정 부류에 속한 당사자 혹은 제3자로서 분노를 느낄 때 우리는 의분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역사적으로 옳지 않은 사회적 관행에 대해 분노 감정을 가졌던 사람들 중에는 자신에게 생긴 의로운 분노를 훌륭하게 잘 소화해서 사회적 변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도의 간디나 미국 흑인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한국 역사에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의분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경우처럼 부당하고 불공정한 사회 제도나 권력에 대한 분노는 아니지만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짓밟는 악한 범죄나 개인의 사욕을 위해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는 일에 대한 분노도 의분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아동 성학대나 포르노 상품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 청소년들에게 마약을 판매하는 사람들, 뇌물을 받고 일을 불공정하게 처리하는 공무원들에 대해 의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이 자신의 사욕을 위해 국민을 기만하는 일을 한 것이 밝혀진다면 국민들은 당연히 의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 혹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서부터 비롯된 분노도 의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노가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면 그런 일도 의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볼 수 있는 일들 중에 전통토속 종교와 기독교를 혼합시켜서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라고 말하면서 성경의 메시지는 가르치지 않고 토속종교의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 강조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 분노가 생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사람들에게 비추어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분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셨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셨을 뿐 아니라 그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2:14-16)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우리들에게 의분의 경우에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기록을 보면 당시에 장사하던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예수님께 대항하지 않은 듯하고 다만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라고 질문했을 뿐입니다. 이 내용에 비추어볼 때 예수님께서 당시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보이셨던 분노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정당한 분노, 즉 폭력이 아니라 책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에는 사회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금지하고 있으므로 불의로 인해 생긴 의분이라고 하더라도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현장에서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친 베드로를 향해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상 의분을 선한 결과로 이끌었던 사람들은 비폭력 저항운동을 했다는 사실도 참고해야 할 사례들입니다. 

의분은 자기의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에 갇힌 사람은 자신의 분노가 합당한 분노 혹은 의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게 되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곧 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칫하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다른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노하기 쉽고 자신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에서는 자신의 생각이 보편적인 의와 정의를 대변한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의로운 분노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경우는 사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분노도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되는 견해와 주장을 가진 그룹들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정보들을 퍼뜨림으로써 발생되는 불상사들이 많이 있고 그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서 상대방에 대해 분노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불의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의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기관이 불의를 행한 것이 아닌데 불의를 행했다고 오해해서 분노한다면 이는 의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는 오해에서 비롯된 분노이므로 의로운 분노가 아니라 부당한 분노에 해당합니다.

세상에는 의분을 느낄 만한 일들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의분을 느끼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분노의 표현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분노는 옳지 않은 일에 대해 느끼는 분노 감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옳지 않은 일을 선한 변화로 이끌어내는 행동과 함께 짝을 이룰 때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박진경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객원교수, Family Alive 대표, 홈페이지: www.familyalive.ca, 이메일: inquiry@familyaliv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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