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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메시아가 열어젖힌, 찬란한 도래의 새벽_토론토 큰나무교회 김동욱 목사(전 미주성결교회 총회장)

상처 입은 메시아가 열어젖힌, 찬란한 도래의 새벽

토론토 큰나무교회 김동욱 목사(전 미주성결교회 총회장)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저 높은 보좌 위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위엄 있는 주권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마가복음이 거칠고 투박한 필체로 꾹꾹 눌러 담은 예수님의 얼굴은 전혀 다르다. 그곳의 예수님은 세상이 그어놓은 수많은 경계선 앞에서 매번 가던 길을 멈추고, 당신의 존재 전체로 ‘차연’과 ‘환대’를 살아내며, 마침내 상상할 수 없었던 전적인 타자의 ‘도래’를 선포하신 분이었다.

1세기 유대 사회는 정결과 부정, 내부와 외부라는 차가운 이분법의 격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안전한 체계 안에서 주인이 되어, 자격이 없는 이들을 밖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완고한 경계선 위로 걸어가셨다. 당대의 법과 상식이 허락하지 않았던 문둥병자, 혈루증 여인,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이라는 ‘전적인 타자’를 아무런 조건 없이 품어 안으실 때, 그것은 인간의 계산법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무조건적인 ‘환대‘(Hospitality)였다. 자격 심사도, 반성의 대가도 요구하지 않은 채 “내가 너를 영접한다”며 손을 내미신 예수님의 식탁은, 조건적 세상을 무너뜨리는 가장 순수한 선물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숨기셨다. 베드로가 정답 같은 고백을 했을 때조차 침묵을 명령하신 그 ‘메시아 비밀’은, 데리다가 말한 ‘차연‘(Différance)의 가장 눈물겨운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군사적 해방자나 승리자라는 고착된 단어로 규정되어 인간의 욕망 속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셨다. 참된 메시아의 의미가 당대의 담론 속에서 오염되지 않도록, 예수님은 그 의미를 끊임없이 미끄러뜨리고 유예하시며(지연), 오직 십자가라는 전혀 다른 자리(차이)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다. 우리의 얄팍한 언어로 하나님을 다 안다고 자만하지 못하도록, 진리의 현재화를 끊임없이 뒤로 미루신 외로운 침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른 십자가의 밤, 예수님은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주인(Host)이 아니라, 인류가 쏟아내는 모든 증오와 배척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스스로 찢기는 인질(Hostage)이 되셨다. 당신의 주권을 완벽히 내려놓고 타자의 폭력에 자신을 내어주신 절대적 ‘환대’의 절정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두꺼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그 격벽이 찢어지는 순간, 비로소 인간이 상상할 수 없었던 신의 정의, 즉 전적으로 다른 이웃이 내 삶으로 밀려 들어오는 참된 ‘도래‘(To-come)의 사건이 역사 한복판에 터져 나왔다. 과거의 율법 체계로는 결코 규정할 수 없는, 끝없이 열려 있는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우리에게 도래한 것이다.

이 찢어진 휘장 너머로 터져 나온 ‘도래’와 ‘차연’과 ‘환대’의 온기는 1980년 5월, 고립되어 울부짖던 광주의 거리 위에도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탱크와 총칼의 공포 앞에서도 시민들은 문을 열어 낯선 이를 숨겨주었고, 대가 없이 주먹밥을 뭉쳐 나누었으며, 부상자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자격과 조건을 계산하지 않고 서로의 호스트이자 인질이 되어주었던, 거룩하리만큼 아련한 절대적 환대의 새벽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눈물의 역사는 온라인 공간의 차가운 모니터 뒤에서 조롱 섞인 밈(Meme)과 혐오의 언어로 얼어붙고 있다. 혐오를 처벌하자는 단호한 법(Law)의 목소리가 높지만, 그것만으로는 타인의 슬픔을 비웃는 무감각한 마음을 녹일 수 없다. 법은 폭력을 잠시 묶어둘 뿐, 참된 구원은 혐오 세력이 만들어낸 고착된 편견의 언어를 해체하고(차연), 고통받는 이들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는(환대) 길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인생의 가장 뜨거운 계절을 지나고 있는 기독교인인 우리는, 예수님께서 몸소 살아내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컴퓨터 화면 뒤에 숨어 타인의 비극을 유희로 소비하는 혐오의 유행에 단호히 등을 돌리는 것. 교회와 일터에서 5·18을 오해하고 비하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손쉬운 정죄나 배제 대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네며 그 고착화된 편견의 언어를 해체해 나가는 ‘차연’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 그리고 1980년 5월의 주먹밥 정신을 오늘날 우리 곁에서 외롭게 울고 있는 세월호·이태원의 유가족들, 소외된 이주노동자들과 소수자들을 향해 내 집을 전면적으로 열어주는 ‘무조건적 환대’로 넓혀가는 것.

마가복음은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당혹스러운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완벽하게 닫힌 결론을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그곳에서 만나자는 다정한 약속만을 남긴다. 갈릴리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들이 서럽게 모여 살던 경계 밖의 공간이다. 복음서의 결말이 이토록 열려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과거의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 마주해야 할 ‘도래할 미래‘(To-come)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이 쳐놓은 혐오와 차별의 벽을 찢고, 아파하는 타자들의 삶 속으로 깊이 걸어 들어갈 때, 우리는 그 시린 갈릴리의 한복판에서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부활한 예수님을 비로소 대면하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세상의 가치 속에서(차연), 상처 입은 이들을 조건 없이 영접하고(환대), 그렇게 열린 틈새로 밀려오는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것(도래).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내야 할 가장 눈물겨운 신앙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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