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진영이 주장하는 이상한(?) 삼위일체(3)
박진영은 자신의 강연에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두 번째 핵심 논리로 “‘하나님’은 이름이 아니라 지위와 격을 뜻하는 직함(Status)이다”라고 주장한다. 직함이란 무엇인가? 오를 수 있는 자리다. 최근 기업 경영이나 조직 문화에서는 출신이나 연공서열을 파괴하고 능력을 입증한 이에게 ‘대표’나 ‘임원’ 같은 타이틀을 부여하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배경이 달라도 자격을 갖추면 그 지위와 격(Level)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온 우주의 창조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그분의 거룩한 본질이 아니라 단순히 누군가 도달하거나 부여받을 수 있는 ‘회장님’ 같은 직급이나 타이틀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경영하며 화려한 무대를 기획하던 대중문화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인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기업의 직함처럼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자리로 격하시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름이 아니라 지위와 격을 뜻하는 직함일까?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증할 수 있을까?
첫째, 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순한 지위나 직함(Status)이 아니라, 피조물과 구별되는 유일무이한 신적 본질(Essence, Nature)을 의미한다. 성경은 결코 하나님을 특정 위치에 오른 존재나 직급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특히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8절에서 거짓 신들을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의 차이를 지위가 아니라 본질의 차원에서 구별한다. 성경에서 참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어떤 지위나 직함을 획득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영원하고 고유한 신적 본질 때문이다. 직함은 누군가 부여하고 누군가 받을 수 있지만, 신적 본질은 피조물이 획득하거나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신 분이 아니라, 영원부터 본질상 하나님이신 분이다.
둘째, ‘야훼(여호와)’는 성부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 분 참 하나님의 언약적 이름이며, 신약은 이 야훼의 이름과 권위를 성자에게도 명백히 적용한다. 출애굽기 3장과 6장에서 계시된 이 이름은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분의 이름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구약에서 야훼께 속했던 말씀과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께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성자께서 성부와 본질이 다른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한 분 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낸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포하는데, 이는 구약 요엘서 2장 32절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를 예수님께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다는 정도를 넘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적 자기계시를 강하게 환기하신다. 이에 유대인들이 즉시 돌을 들어 치려 한 반응(요 8:59) 역시 그 말이 단순한 선재 주장 이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성경은 성부와 성자를 본질이 다른 두 신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구약에서 야훼께 속한 신적 이름과 권위는 신약에서 성자께도 적용된다.
셋째, ‘예수’라는 이름은 성육신과 함께 역사 속에서 주어진 이름이다. 박진영은 성자의 고유한 이름이 ‘예수’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영원 전부터 성자께서 지니신 이름이 아니라, 성육신하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는 사역과 함께 주어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성육신 이전에 그분은 누구셨는가. 성육신 이전에도 그분은 영원하신 성자이셨다. 요한복음은 바로 그 영원하신 성자를 ‘말씀’ 곧 ‘로고스(Logos)’라고 계시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말하는 말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말이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여기서 말씀 곧 로고스는 비인격적 원리도, 하나님이 부리시는 대리자도 아니다.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동시에 친히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성자께서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이심을 나타내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것은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지니신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이는 골로새서 1장 16-17절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선언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히브리서 1장 3절은 성자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한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 1장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선언한다. 요한은 모든 피조된 존재를 성자를 통하여 창조된 것의 범주 안에 넣는다. 따라서 성자 자신을 피조물의 범주에 넣는 것은 이 말씀의 논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따라서 성자의 영원한 정체성을 성육신 이후 역사 속에서 주어진 ‘예수’라는 이름에서부터 출발하여 규정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 순서를 뒤집는 것이다. 성자께서는 예수라는 이름을 받기 이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그 영원하신 성자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역사 속에 오셨을 때 주어진 이름이며, 이후에도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을 영원히 가리키는 이름이다.
넷째, 하나님을 여러 존재가 공유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직함으로 보는 시각은, 그의 다른 주장들과 결합될 경우 다신론적 구조와 존재론적 종속설로 나아갈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 그의 설명에는 더 근본적인 모순도 생긴다. 한편으로 그는 성부와 성자를 ‘동등한 두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자의 신성이 본래부터 지니신 것이 아니라 성부께서 영을 부어 세워 주심으로 얻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두 존재는 실제로 동등할 수 없다. 신성을 본래부터 가지신 분과 그 신성을 다른 존재에게서 부여받은 분 사이에는 존재론적 비대칭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구속 경륜 안에서 성자께서 성부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시는 기능적 질서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성자의 신적 본질 자체가 후천적으로 부여되었다고 보는 순간,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이신 영원한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하위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배격한 존재론적 종속설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위계 구조를 끝까지 밀고 나가 성자를 피조된 하위 존재로 규정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가 아리우스주의이며, 오늘날에는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유사한 기독론을 볼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하나님을 인간의 경영 원리나 계급 체계의 좁은 틀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직함을 공유하는 복수의 신들이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이시지만, 신적 본질은 하나이시다. 어느 한 위격이 다른 위격보다 더 하나님이거나 덜 하나님인 것이 아니라, 세 위격 모두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는 세 분의 하나님이 하나의 신성을 나누어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신적 본질은 하나이며 나누어지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는 인간의 조직 논리로 쪼개고 나눌 수 없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진리다. 다음 호에서는 그의 세 번째 주장, “성경의 ‘하나님은 한 분’은 성부 하나님만을 가리킨다”는 논리를 검토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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