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설.래임 設.來臨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에노스

設.來臨 I 말씀이 찾아와 임하다 I 설.래임 칼럼
에노스

전도서 7장 4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참된 지혜자는 자신이 죽음의 한계에 갇힌 존재임을 잊지 않습니다.

창세기 4장은 동생 아벨을 살인한 가인과 그 후예들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붙입니다. 에녹은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보호없이 자기 힘으로 멋지게 새출발해서 잘 살겠다는 지극히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러한 가인과 그 후예들의 삶은 성공적인 듯 보입니다. 그들의 자손은 번성합니다.(창4:18) 그들의 자손들(야발, 유발, 두발가인)은 세상의 무역, 경제와 예술, 문화와 과학, 기술의 선구자들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인데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형통하고 탁월해보이기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이 결코 결론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5장은 인류의 오래된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인간은 결국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창 5장에서 8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죽었더라”입니다.

창 5장의 족보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선지자 에녹을 제외하곤 모두가 다 “죽었더라”로 그들의 생애가 매듭이 지어집니다. 인간은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하고 많은 것을 성취하고 탁월한 생애를 살지라도 결국 죽는 존재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죽음은 단순히 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히 9장 27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창 4장 25-26절은 이러한 죽음의 한계에 갇히고, 죽음 이후의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손에 죽임 당한 아벨 대신 셋을 세상에 보내십니다(25절). 아벨은 그의 삶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예배자’였습니다. 대신한다는 뜻의 이름인 셋은 예배자로 세상에 부름받았던 것입니다.

예배자 셋은 자녀를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짓습니다. 에노스는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자녀의 이름을 ‘결국은 죽을 존재’라고 짓는 법이 어디있습니까? 에노스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이름이었습니다. 에노스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들으며 자신 역시 에노스임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점점 그 메시지를 듣고 깨달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던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창 4장 26절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참조: 창 13:4)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몇 백년씩이나 되니 사람들은 한동안 자기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전혀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셋이 에노스를 낳을 때 즈음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서 병으로, 사고로, 분쟁과 다툼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는 것을 차츰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에노스의 이름을 듣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깨달아지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이룬다 해도, 우리의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러나, 예배자들만은 사망의 권세를 뛰어넘습니다.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를 두려움으로 맞이하지 않습니다. 예배(제사)를 통해 어린양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기 때문입니다.

에노스란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 시대에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그 메시지를 깨닫고 자신의 삶의 돌이켜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에녹성을 쌓고, 그 안에서 번성하고 번창하는 일에만 매달려 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것은 전도자의 가르침처럼 헛된 시도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과 영원한 삶을 주관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FULLERTON 나들목비전교회 권도근 목사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