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박창수 목사의 희년이야기 박복영과 암태도 소작쟁의

[칼럼: 희년 이야기] 박복영과 암태도 소작쟁의

박복영과 암태도 소작쟁의

박복영(朴福永, 1890-1973)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암태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한학을 했지만, 1908년에 목포 성경학원에 들어간 후 기독교 전도 사역에 헌신하였다. 1919년 삼일 운동 당시, 그는 목포에서 기독교인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수백 명의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6개월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0년에 석방된 후, 그는 고향인 암태도로 들어가 ‘암태 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물산장려운동과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 ‘여자 강습원’을 설립해서 여생도 40여명을 교육시켰고, 1922년에는 ‘암태 사립 3.1학사’를 설립하여 학사장을 맡았으며, 1923년에는 야학을 6개소(나중에는 12개소로 증가)나 설립해서 30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교육 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는 1923년, 수확량의 7-8할에 이르는 살인적인 고율의 소작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회원을 중심으로 ‘암태 소작인회’를 조직하도록 하여, 1924년까지 이어진 암태 소작쟁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암태도에서 해마다 3천석의 소작료를 걷고 있던 지주(地主) 문재철과 담판하였으나 거절당했을 때, 성경의 ‘출애굽기’를 떠올렸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해 이집트 왕과 몇 차례나 담판하였으나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역사는 성취되었다. 

소작농민들은 단결하여, 1923년 가을 수확기에 벼 베기를 거부하였고, 일제 경찰의 갖가지 위협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1924년에 지주 측과 물리적으로 충돌한 소작농민 13명이 목포 경찰서에 구금되자, 암태도 주민들은 배를 타고 목포 경찰서로 몰려가서 아사(餓死)동맹의 농성을 결행하였다. 

“보라! 저 600여명의 남녀노유(男女老幼)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생명까지 내어놓고 법정에서 천(天)으로 더불어 이불을 삼으며 지(地)로 하여금 요를 삼고 수 삼일을 기아(飢餓)하면서 주린 창자를 움켜잡고 마르는 목을 견디면서 13인 형제의 방면을 애호비읍(哀呼悲泣)하는 비절참절(悲絶慘絶)한 애경(哀景)을 보라!”(<동아일보> 1924년 7월 17일자)

암태 소작쟁의는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 언론의 적극적인 보도에 의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하는 데 지주 문재철이 동의하는 성과를 올림으로써,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 운동이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윤성덕 목사와 함께 상해로 가려다가 신의주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3개월간 구류를 당하기도 했고,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책임을 맡아, 상해와 국내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는 1925년에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부탁하는 이시영 선생의 밀서를 갖고 국내로 잠입하여 이상재 선생에게 무사히 전달했지만, 모금 활동을 하던 중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출감한 후에도 1926년에 ‘암태 남녀학원’을 설립하였고, 같은 해에 동아일보 목포지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 암태도 옆에 있는 자은도에서 소작쟁의 운동을 배후에서 이끌다가 광주 형무소에 1년간 수감되었다. 그는 출감한 후에는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하였는데, 암태 소작쟁의 당시의 지주였던 문재철이, 독립운동 자금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 온 선생에게, 거액을 쾌척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부 경무 주임, 해방 후에는 무안군 건국준비 위원장을 역임했다.

박복영 선생과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복음전도자인 문준경(文俊卿, 1891∼1950) 전도사의 헌신적인 노력은 연합하여 자은도를 비롯하여 신안군 일대에서 교회의 설립과 성장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박복영 선생은 일제에 의해 수배를 받자 자은도 백산으로 피신하여 백산학당을 세워 신교육을 장려하였고, 공회당에 젊은이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 후에는 그가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는데, 이 때 백산 기도소가 개척되었다. 

그런데 문준경 전도사는 전도여행 중에 자은도에 와서 사촌 언니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고장교회(현 자은제일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자은제일교회가 전도에 주력하여 1957년에 박복영 선생이 있던 백산기도소를 모태로 자은서부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곧 자은서부교회는 박복영 선생과 문준경 전도사의 공동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은서부교회가 위치한 마을은 2012년 기준, 기독교인 비율이 100%로서 어린이를 포함한 마을 주민 150여명이 모두 기독교인이다. 이런 놀라운 부흥은 역대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인들의 뜨거운 기도와 전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그 역사적 배경에는 박복영 선생에 대한 주민들의 존경심이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박순동, 『암태도 소작쟁의』, 이슈투데이(주), 2003.

임병진·유승준, 『천국의 섬』, 가나북스, 2007.

spot_img

최신 뉴스

인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