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희년 이야기] 메시지와 메신저

메시지와 메신저

눅 20:1-2,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말씀으로 전하신 메시지는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이 메시지가 싫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옳았기 때문에 공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메시지를 전한 메신저를 공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곧 그런 메시지를 전할 권위가 예수님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메시지와 메신저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하나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이고, 다른 하나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이다.

첫째, 메시지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약 그 메시지가 옳다면 그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가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말씀으로 전하신 메시지가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메시지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고 위협하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메시지를 무력화하기 위해서 그 메시지를 전한 메신저를 공격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교회와 사회에서 정의로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위선자들이 취하는 비열한 방법이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어떤 메시지가 우리의 기득권을 침해하고 위협한다 하더라도, 또 그 메시지를 전한 메신저가 우리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거나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양심에 옳다고 판단된다면, 그 메시지를 받아들여 우리의 삶을 고쳐나가야 하고 그 메시지를 전해준 메신저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옳은 태도이고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둘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약 그 메시지가 옳다면 그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 자신의 삶이 그 메시지와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메신저는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 그 모범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가르치셨고(눅 6:27-28),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몸소 그대로 행하시어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다(눅 23:33-34).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말씀이시다(요 1:1).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예수님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을 메시지로 바꾸면, 예수님은 육신이 되신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전하신 메시지를 자신의 온 삶으로 살아내고 보여주신 메신저이시다. 그 삶이 메시지 자체이신 메신저이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우리 자신의 온 삶으로 살아내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메신저는 그 삶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일치해야 한다. 메신저의 삶은 메시지 자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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